『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따르면 충렬왕 때 시중 이혼(李混)이 영해(寧海)에 유배되었을 때 바닷가에서 물에 뜬 뗏목을 얻어 큰 북을 만들었더니 그 소리가 크고 웅장해 북을 두드리며 춤춘 데서 기원했다고 한다.
춤의 형식은 북을 가운데 놓고 원무(元舞: 북채를 들고 북을 치는 사람)와 협무(挾舞: 원무 주위를 돌며 춤추는 사람)로 나누어져, 원무가 북채를 두 손에 들고 시종 북을 에워싸며 마치 꽃봉오리 위에 하늘거리는 나비인 양 어르고 두드리며 도는 동안 협무는 삼지화(三枝花)를 두 손에 들고 그 둘레에서 논다. 그 춤이 바뀌는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나비가 꽃을 어르면서 펄럭이는 것 같고,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빼앗으려고 다투는 것 같은데, 악부(樂部)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춤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면을 지니고 있다.
무고에 대해서 기록한 문헌으로는 『고려사』 · 『악학궤범(樂學軌範)』 · 『홀기(笏記)』 및 1920년대의 『무고무보(舞鼓舞譜)』 등이 있다. 이 중 『고려사』 · 『악학궤범』, 1920년대의 무보 등 세 기록을 비교, 분석해보면 세 기록이 모두 ① 입장에서 읍(揖)하기까지의 도입부, ② 북을 울리지 않고 춤추다가 북을 울리면서 춤추고 절정을 이루는 주요부, ③ 읍하고 퇴장하는 종결부로 이루어진다.
1829년(순조 29)에 편찬된 『진찬의궤(進饌儀軌)』 권3에 따르면, 무고의 의상은 무원(舞員)이 화관을 쓰고 청 · 적 · 흑 · 초록 단삼(單衫), 속은 남색상(藍色裳), 겉옷은 홍초상(紅綃裳)을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鏤繡帶)를 띠며, 오채한삼(五彩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또, 1848년(헌종 14)의 『진찬의궤』 권3 정재여령조(呈才女伶條)에는, 위 여령의 복식과 같고 황초단삼(黃綃單衫)에 각각 청 · 홍 · 흑 · 백의 쾌자를 입는 것이 다르다. 1877년(고종 14)의 『진작의궤』에서는 원무가 자적갑사괘자(紫的甲紗掛子)에 남전대(藍戰帶)를 띠는 점이 순조, 헌종 때의 복식과 다르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