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자의 형태는 대금에 둥근옷깃이며 무가 있고 옆트임과 뒷트임이 있는 전복(戰服)과 비슷한 옷이나, 다른 점은 전복에 비해 어깨넓이가 좁은 점이다.
정약용(丁若鏞)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쾌자는 괘자(褂子)나 괘자(掛子)가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어원적으로 고증하였다. 『정리의궤(整理儀軌)』(1795년, 정조 19)에서 무인(舞人)이 입었던 괘자는 당시 동다리위에 착용했던 전복과 같으며 현재까지 어린이 돌복으로 입혀지고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1809년, 순조 9)에 군복으로 홍색 3승포(三升布) 청색 목면쾌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후세에 와서 쾌자를 답호(褡護)라 하며 하급군속 및 조예의 제복이 되었다고 하였다.
장서각·이왕실 고서의 『의대발기(衣襨發記)』(왕과 비, 왕세자와 비의 의류물목)와 『의복발기(衣服發記)』(의대발기 이외의 의류물목)를 보면 주의(周衣) 위에 쾌자를 착용하였다.
영조 재궁의대(梓宮衣襨)에는 답호와 전복이, 정조 재궁의대에는 답호와 쾌자가, 순조 재궁의대에는 쾌자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순조 때는 답호, 전복, 쾌자의 형태가 같아졌고 용어는 혼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본다. 실물을 보면 한가지 형태인데 정리의궤의 괘자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