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는 대(帶)라고 한다. 띠는 원래 원시인들이 허리에 매었던 끈에서 발생한 것이다. 동물의 가죽이나 헝겊으로 만들다가 금속 장식인 과(銙)를 붙여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장식적인 띠도 만들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띠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삼국시대의 것이 제일 오래이지만, 그 이전에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제7대 고이왕 때 신분에 따라 대의 색을 달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7품 장덕(將德)은 자대(紫帶), 8품 시덕(施德)은 조대(皁帶), 9품 고덕(固德)은 적대(赤帶), 10품 계덕(季德)은 청대(靑帶), 11품 대덕(對德)과 12품 문독(文督)은 황대(黃帶), 13품 무독(武督)에서 16품 극우(克虞)까지는 백대(白帶)이다.
또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백제왕은 소피대(素皮帶)를 띠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당나라 고종(高宗)에 패하였을 때 자금대(紫金帶)를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고 고분 벽화에도 유(襦)와 포(袍) 위에 포백대를 맨 그림이 많다. 신라는 진평왕 즉위년에 상황(上皇)이 옥대(玉帶)를 왕에게 받으라 하였다는 기록과 진덕여왕 3년 1월에 중국의 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는 기록밖에 없다. 그러나, 포백대를 맨 그림이나 비석 등이 있고, 과대(銙帶)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과대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과의 형태와 붙인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금속제 방형(方形)의 얇은 판에 좌우 대칭으로 당초문을 투조한 과판 30∼45개를 혁대 또는 포백대 위에 연결하여 못으로 붙인 것이다. 과의 밑에는 심엽형(心葉形)의 것이 달려 있어 거기에 각종 요패를 연결하게 하였다. 창녕·양산과 경주 보문리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은 심엽형의 얇은 과판 10개를 혁대 또는 포백대 위에 붙인 것이다. 각 과에는 둥근 환(環)을 정첩장식으로 달아 늘어뜨렸고 양쪽 끝에 교구(鉸具)를 붙였다.
이것은 요패를 늘어뜨리는 과대에서 요패가 없어진 과대로 되는 과정의 것으로 추측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과대는 크고 작은 타원형의 과판이 번갈아 연결된 형태이다. 요패는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물을 말하는 것으로 계급에 따라 수식이 달랐다. 경주 황남동 98호 북분출토품의 요패 배치순서를 보면 왼쪽으로부터 금모자곡옥·금제곡옥·장방형판·물고기형·금장도·장방형판·투조도자병형금판(透彫刀子柄形金板)·금침, 장방형판 2개, 대형요패·장방형판·금제곡옥의 순서이다. 그러나 남분출토품은 달라서 왼쪽에서부터 금모자곡옥·대형요패·물고기형·족집게형·투조도자병형금판·금모경옥제곡옥의 순서로 피장자(被裝者)의 앞쪽에만 달려 있다.
통일신라 때의 흥덕왕 복식금제 중 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골대등(眞骨大等)에서 평민까지 계급에 따라 연문백옥(硏文白玉)·오서(烏犀)·유(鍮)·철·동·은대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대는 요패가 늘어지지 않은 과대로, 정대(鞓帶)·혁대(革帶)·속대(束帶)로 불린 대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며, 당나라의 옷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고려도경(高麗圖經)』 등에서 대에 관한 기록이 있고 유물도 있다.
이때의 대로는 혁대·속대·정대·사대(絲帶)·전대(纏帶, 戰帶) 등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전하여진다. 조선시대의 대는 백관복에 착용하는 대와 평상복에 매는 사대와 광다회(廣多繪)·전대·대대(大帶)·광대(廣帶) 등 포백대로 대별된다. 계급에 따른 대의 착용은 백관복과 함께 『경국대전』에서 완성되었고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부분적으로 보완, 수정되었다.
재료에 따라 구분하여 보면 옷감으로 된 대대·광대·전대·말대(抹帶), 실로 짠 사대·광다회, 가죽이나 견 위에 금속제 과를 붙인 혁대(또는 속대)·정대(또는 야자대), 금속제인 요패가 늘어진 과대가 있다. ① 대대 : 왕이나 백관의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왕비의 적의(翟衣)에 착용하였다. 견이나 비단으로 만들었고 허리 부분과 늘어뜨린 부분이 있으며, 여기에 실로 짠 조(組)를 더하여 늘어뜨렸다.
『진서(晉書)』 여복지(輿服志)에 의하면 원래 대대는 신(紳)이라 하여 홀(笏)을 꽂았던 것인데 차차 변형된 것이라 한다. 조선에서는 명나라 제도와 같이 수(綬)를 달아 허리에 둘렀다. 왕이 면복에 착용하는 대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서례(序例)에 의하면, 비색(緋色)과 백색 증(繒)을 합하여 꿰맨다고 하였는데, 선(襈)의 색은 명시되지 않았다. 『상방정례(尙方定例)』와 『의궤(儀軌)』에는 색 사용이 일정하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한말의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는 겉은 소색(素色), 안은 주색(朱色)이고, 위는 주색선을 대고 아래는 녹색선을 댄다고 하였다. 또 금(錦)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백관의 대대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조선말의 유물을 보면 겉은 백색 비단이고 안은 적색 비단이며, 겉과 안 모두 검은색 선을 대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보라색 선을 두르기도 하였고, 조가 없이 적색 비단과 청색 비단을 신의 크기와 같게 만들어 두 겹을 양쪽으로 늘어뜨리기도 하였다.
② 광대 : 구군복에 사용된 대로 안은 무명, 겉은 비단으로 하여 심을 넣고, 너비는 14, 15㎝, 길이는 가슴둘레 정도로 만들었다. 이것은 전복(戰服) 위에 가슴 위쪽으로 바짝 치켜 꼭 졸라맨다.
③ 전대 : 기다란 헝겊을 사선으로 돌려가며 박아 만든 대로 전시에는 군졸들이 쌀을 넣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고려말에 순군(巡軍)·나장(螺匠)·영정(領正)·위정(尉正) 등이 매도록 규정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전복 위에 매었다. 구군복을 착용한 고급 무관도 전복 위에 매었는데, 유물로는 비단·견·사(紗)로 된 30∼40㎝ 길이의 고급품이 남아 있다. 전대(纏帶)는 글자가 말하듯이 돌려가며 바느질된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군인들이 주로 매게 되어 전대(戰帶)로 변하였다.
④ 말대 : 다듬은 흰 명주로 꿰매어 만든 허리띠로 삼국시대의 유와 포위에 매던 포백대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아악(雅樂)의 각 차비(差備) 공인(工人)의 띠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의 남자 바지와 여자 치마의 허리띠와 같다. ⑤ 사대와 광다회 : 실로 짠 대로 사대는 원통형으로 짜고, 광다회는 넓게 짰다. 이것들은 조선시대 때 양반 평상복의 가슴 위에 매던 것으로 계급에 따라 색이 달랐다.
⑥ 정대(야자대) : 고려와 조선 때 공복에 착용하던 대이다. 포(布)로 대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가죽을 댄 다음, 장방형 혹은 방형으로 된 과를 연결시킨 것이다. 이것은 혁대보다 길이가 길어 뒤나 옆으로 길게 늘어뜨리게 되어 있는데 신분과 계급에 따라 과의 재료가 달랐다.
⑦ 혁대 : 조선시대 상복(常服)과 조복·제복에 착용하던 대로 속대라고도 한다. 이것은 심엽형의 과를 붙였으며, 양쪽 끝에 교구가 있어 물리게 되어 있다. 가슴에 띠었는데 길이는 착용자에 따라 달라서 109∼141㎝였다. 가슴둘레보다 크므로 겨드랑이 밑에 대끈을 달아 고정시켰다. 이것도 과의 재료에 따라 신분과 계급이 구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