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笏)은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문관이 모양을 꾸미는 장식품의 일종으로, 임금에게 보고할 사항이나 건의할 사항을 간단히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비망하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라 규격과 색채와 질이 정해져서 중국에서는 옥·상아·서각(犀角) 등이 사용되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온 우리나라에도 이 제도는 오래 전에 도입되었다. 조선조가 창건되어 유학이 국교로 채택되자 홀에 대한 제도도 확정되었다. 조선조에 제정된 홀은 한 자 정도의 길이에 두 치 정도의 너비로 얇은 것이며, 1품에서 4품까지는 상아로 만들고 5품 이하는 나무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
홀기는 이 홀의 사용이 발달됨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문명이 발달될수록 생활의 방식도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생활을 통제하는 방법도 번잡해졌다.
인간을 자율적으로 통제한다는 예는 점차 까다로워져서 자칫하면 착오를 범하기가 일쑤고, 그 착오는 실수로 좋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내리고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와 보고를 행하는 절차가 필요했으며, 그 필요에 따라 발달한 것이 홀기다.
홀기는 크게는 국가의 조참(朝參)과 상참에서부터 종묘·사직·배릉(拜陵) 등의 의식에 이용되고, 작게는 시학(視學)·입학(入學)·석전(釋奠)·전시(殿試)·방방(放榜)을 비롯해 양로연(養老宴) 등에도 이용되었다.
민가에서는 서원의 유회, 향회(鄕會)를 비롯해 향음주례(鄕飮酒禮)·강학례(講學禮) 등에도 이용되고 심지어 혼례·관례·제례 등 사가의 행사나 의식에까지도 이용되었다. 홀기는 절차를 미리 의정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