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폭넓게 사귀었으며, 660년에 왕에게 천거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고자 출병할 때, 좌장군인 아버지 밑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였다. 신라군은 황산(黃山)에서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그런데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의 결사대는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해 신라군에 대항했으므로, 처음 네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질 뿐이었다. 마침내 신라와 백제 양국의 운명을 건 황산벌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가 관창을 불러 이 싸움에서 공과 명예를 세울 것을 독려하였다. 이에 앞서 신라 장군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도 자기 아버지의 명을 받고 적진에 나아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관창은 곧 적진에 뛰어들어 가 싸웠으나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계백은 관창의 어리고 용맹함에 탄복해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적장을 죽이고 적기(敵旗)를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긴 관창은 다시 적진으로 돌진해 싸우다가 또다시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계백은 이번에는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용감한 죽음에 자극된 신라군은 분연히 진격해 계백을 죽이고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백제를 평정할 수 있었다. 태종 무열왕은 그 전공을 높이 기려 급찬(級飡)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 주었다.
고려 말기에 경주 지방에서 황창(黃昌)의 가면검무(假面劍舞)가 공연되었는데, 이것을 관창의 용맹과 충절을 숭상하기 위해 만든 검무와 연결시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나이 어린 소년이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 가 전사하게 한 것은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충효 정신과 화랑 정신이 투철한 인물로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