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지 및 족성(族姓)은 모른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와 백제의 항쟁이 한창이던 중, 647년(진덕여왕 1)에 백제의 대군이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桐岑) 등 3성을 공격해오자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은 1만의 군사로 이를 막았다.
그러나 백제군은 매우 강하여 전세는 신라에 불리해지고 신라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그러자 김유신은 비령자에게 이때야말로 그 용맹을 드러낼 때라 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일 임무를 주었다.
비령자는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군사들 가운데 그러한 중대한 임무를 자신에게 맡겨주는 것은 장군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라 감격하여 이에 보답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적진에 돌진하여 적과 싸우다 죽었다.
이를 본 그의 아들 거진(擧眞)은 종 합절(合節)에게 남긴 아버지의 유언도 듣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죽었으며 합절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 3인의 용맹과 죽음은 신라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우었으며 결국 신라군은 백제군 3,000여급을 베고, 백제장수 의진(義眞)은 혼자 달아났다.
이로써 신라군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김유신은 이들 3인의 시체를 거두어 자신의 옷으로 덮어주며 통곡하였고, 왕도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고 예로써 반지산(反知山)에 장사지내주고 그 가족에게는 후한 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