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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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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
내용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帽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루어진다.

원래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쓰개였으나, 재료·형태·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갓은 형태상으로 볼 때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方笠型]과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平凉子型]의 두 계열이 있다.

방갓형의 갓으로는 삿갓[蘆笠]·방갓[方笠]·전모(氈帽) 등이 있다. 패랭이형으로는 패랭이·초립(草笠)·흑립(黑笠)·전립(戰笠)·주립(朱笠)·백립(白笠) 등이 있다. 넓은 의미의 갓이라고 하면 방갓형과 패랭이형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것을 말하나, 일반적으로는 좁은 의미의 갓, 즉 흑립을 말한다.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치면서 완성된 흑립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갓으로 정착되면서 사대부나 서민 모두에게 널리 사용되었으며, 섬세하고 미려한 형태로 우리나라 사람의 고유한 멋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의관이 되었다.

갓은 상투 튼 머리에 망건(網巾)과 탕건(宕巾)을 쓰고 그 위에 쓰는데, 외출 때나 의례행사 등 의관을 갖추어야 할 때 사용되었다. 또한, 갓은 흑칠(黑漆)이 본색이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그 색을 달리하였다.

붉은 옻칠을 한 주립은 무관 당상관이 융복(戎服)을 입을 때 착용하였고, 백립은 상복(喪服)에 착용했다. 다만 일반에서는 대상을 지낸 후 담제까지 썼고, 국상(國喪)이 있을 때도 썼다. 의례를 가장 중요시했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대사회적 용도로 사용했던 갓은 위엄과 체모를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갓에 얽힌 여러 이야기는 물론 해학적이며 풍자적인 속담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1) 고대: 갓의 역사는 멀리 고대에 소급되며, 그 시초형(始初形)은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입형백화피모(笠形白樺皮帽)와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龕神塚) 벽화에 나오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갓을 쓴 수렵인물에서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갓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 고려시대에 와서는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됨으로써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357년(공민왕 6)에 문무백관에게 갓을 쓰도록 한 것인데, 이어 1367년 7월에는 아문(衙門)의 정3품 이하 관원들에게 각기 품수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으로 장식된 흑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1374년 4월에는 재상(宰相)·중방(重房)·각문(閣門)이 모두 갓을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의 갓은 재료나 제작기술상 조선시대의 흑립과는 다르나 형태는 패랭이형일 것이다.

(3) 조선: 갓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흑립으로 발전되었다. 태종 때 한때 백관들이 갓을 쓰고 궁궐에 출입한 적이 있었으나, “조로(朝路)에 우설일(雨雪日)이 아닌데도 대소관리(大小官吏)가 착립(着笠)하고 있어 미편(未便)하다.”고 하여, 이듬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紗帽)를 쓰게 되고 갓은 편복(便服)에 착용하게 되었다. 다양했던 관모 중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갓은 특히 양반층에서 즐겨 썼다.

(4) 근대: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賤人層)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함으로써, 의관제도에 귀천의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갓 문화는 계속 이어져 민족항일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의관 갖추기를 잃지 않았고, 지금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자로 ‘흑립(黑笠)’ 또는 ‘입자(笠子)’로 표기되기도 하는 갓은 성인남자용으로 그 형태는 위보다 아래가 조금 넓은 원통형의 모옥(帽屋), 즉 모자집과 아래가 약간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는 양태, 즉 차양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갓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한 갓끈[笠纓]이 있다.

갓은 싸기(갓싸개)의 종류에 따라 진사립(眞絲笠)·음양사립(陰陽絲笠)·음양립(陰陽笠)·포립(布笠)·마미립(馬尾笠) 등으로 나뉘고, 신분에 따라 달리 착용되었다.

(1) 진사립: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다듬은 죽사(竹絲)로 갓모자와 양태를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한올 입혀서 칠을 한 것으로, 왕이나 귀인이 착용하던 극상품(極上品)이다. 왕이 쓰는 이른바 어립(御笠)에는 은각 밑뿌리에 당사(唐絲)를 물들여서 꼰 홍사(紅絲)를 감는다.

(2) 음양사립: 갓모자는 말총으로 곱게 엮고 양태만 죽사에다 촉사를 올려 옻칠한 것이다. 진사립의 다음 등품이며, 은각 밑뿌리에는 청사(靑絲)를 두른다.

(3) 음양립: 말총으로 만든 갓모자인 총모자에 양태는 죽사를 쓰나 양태 위는 촉사 대신 생초(生綃)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음양사립 다음 등품이며, 음양립부터 아래 등품의 것은 은각 밑뿌리에 녹사(綠絲)를 두른다.

(4) 포립: 총모자와 죽사로 엮은 양태로 되어 있고, 양태 위는 명주나 얇은 베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5) 마미립: 종립(鬃笠), 혹은 마종립(馬鬃笠)이라고도 하며, 말총으로 갓모자와 양태를 엮어 만든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종립은 사족(士族)들의 것으로 되어 있고,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에는 당상관 이하는 착용을 금하는 기록이 있으므로, 조선 중기까지는 당상관 이상에서만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립이 사서(士庶)의 통상관모로 일반화되는 동안에도 양태의 크기나 장식·재료 등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시속에 따라 갓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갓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485년(성종 20) 3월 “입자의 모양이 승립(僧笠)과 같으니 이를 개정하라.”고 하는 기록에서부터이다.

당시의 갓은 모자의 정상이 둥그렇고 테가 넓은 형태였다. 연산군 초에는 둥글던 모정(帽頂)이 조금 뾰족하게 변하였고, 이 후부터 모자의 모양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원통형으로 된 것이라 생각된다.

1504년(연산군 10) 5월에는 모자가 높고 양태가 작은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1530년(중종 25) 5월에는 모자의 높이나 양태의 넓이를 절충한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기에는 모자의 높이가 극도로 높아지고 양태는 극히 좁아졌으며, 명종초에는 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를 적당히 가감하여 만든 경쾌한 형태의 ‘김순고입자(金舜皐笠子)’가 등장하였다. 그러다가 곧 다시 모자는 점점 낮아지고 양태는 우산을 펼친 모양처럼 넓어졌다.

1556년(명종 1) 입제(笠制)의 개정이 다시 논의되었으나, 주로 모자가 낮고 양태는 극히 넓은 형태의 갓이 명종 말기까지 쓰였다. 그러나 선조 때에는 초년부터 모자가 높고 양태가 좁아지기 시작하여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그와 반대로 양태가 극히 넓어지고 모자가 아주 낮아져 안반처럼 넓은 양태에 마치 주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갓이 유행되었다. 넓은 양태의 갓이 인조 말부터는 갑자기 모자도 높아져서 이른바 ‘큰갓’이 되었으며, 효종 때까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또, 숙종 때는 한때 모자가 낮고 양태가 좁은 ‘작은갓[小笠]’이 유행했다. 그러나 영·정조 때의 갓은 그 시대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양태가 비교적 넓었다. 거기에 밀화나 호박·대모 등으로 만든 갓끈을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그 멋을 한층 더하였다.

순조 말기에는 양태가 더욱 넓어져서 종전의 어깨를 덮을 정도에서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가 되었는데,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큰갓’은 ‘작은갓’으로 변화되었다. 완고한 것으로만 되어 있던 선비의 의관, 특히 그들이 중히 여기던 갓이 이렇듯 시속에 따라 변천해왔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갓은 질이 좋은 대나무를 아주 가늘게 쪼개어서 실올처럼 가늘고 길게 다듬어서 양태와 모자를 만들어 붙인 다음 싸기를 하고 옻칠하여 완성한다. 따라서, 갓을 완성하는 데는 세 공정을 거치게 된다.

세죽사(細竹絲)나 말총으로 갓모자를 만드는 일과 머리카락같이 가는 대로 양태를 엮는 일, 또 갓방에서 갓모자와 양태를 서로 모아 갓을 완성하는 일로서, 이 세 공정은 각각 따로 행해지는 것이 예사였다.

갓을 모으는 일 중에서는 양태가 아래로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도록 모양잡는 일, 속칭 ‘버렁잡는다’고 하는 일이 가장 숙련을 요하는 일이다. 제주도의 총모자와 거제도의 양태가 특히 유명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갓(흑립)은 인류가 고안해낸 관모 중 세계에서 으뜸가는 제일 화사한 관모이다. 머리에 얹되 쓴 것 같지도 않게 가볍고, 섬세하게 짜여진 차양 위에 내리쬐는 햇살은 얼굴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워 은근한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그러면서도 양태가 넓은 갓을 쓰고 좌정하면 이에서 위풍이 당당하고 기품 있는 선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갓 제작법은 ‘갓일’이라는 명칭으로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의 기능보유자는 김인(金仁)과 정춘모(鄭春模)이다.

(1) 갓 끈: 원래는 갓을 머리 위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턱 밑에 매는 실용적 구실을 하던 부분인데, 차츰 재료가 다양해지면서 장식적인 구실도 겸하였다.

헝겊으로 만든 포백영(布帛纓), 옥·마노·호박·산호·금패·밀화·수정 등으로 만든 주영(珠纓) 및 대로 만든 죽영(竹纓)이 있다. 갓끈은 갓을 쓰면 일단 턱 밑에서 고정시킨 뒤 내려뜨리지만, 주영·죽영은 그냥 장식으로 길게 가슴 밑까지 내려뜨리고 따로 검은 헝겊 끈으로 고정시키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42년(세종 24) 9월 옥석(玉石)·번옥(燔玉) 및 마노 등으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이상에게만 허용하고, 향리에게는 옥·마노는 물론 산호·수정으로 만든 것조차 금했던 기록이 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는 당상관 이상의 갓끈을 금옥(金玉)으로 제도화하였다. 그런데, 1497년 10월에 “입영(笠纓 : 갓 끈)을 포백(布帛)으로 함이 어떠한가.”라는 왕의 전지(傳旨)에 따라서 한때 주영을 폐지하고 포백영으로 고친 일이 있었다. 1508년(중종 3) 정월에는 “입영의 값이 멋대로 높아지니 폐하자.”는 주청이 있었다.

≪대전후속록≫ 예전 금제조에는 여전히 “마노·호박·명박·산호·청금석(靑金石) 입영은 당상관 외는 일체 금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대전회통≫에도 주영에 관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현존하는 주영의 유품들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선대원군 집정시에는 의관과 문물의 간소화시책에 따라 입영으로 대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므로, 한때 죽영이 유행하기도 했다.

(2) 정자(頂子): 갓의 정상에 장식한 꾸밈새로 증자(鏳子)라고도 한다. 계급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고려말 공민왕 때 직품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의 정자를 달리 정하여 흑립에 달도록 한 데서 비롯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경국대전≫ 예전의장조에 의하면, 대군(大君)은 금정자, 정3품 이상은 은정자이며, 사헌부·사간원의 관원과 관찰사·절도사는 옥정자를 사용하고 감찰(監察)은 수정정자를 사용한다 하였는데, 그 제도는 ≪대전회통≫에 기록된 제도와도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장식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오직 옥로(玉鷺)가 있을 뿐이다. 옥로는 옥으로 백로의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서, 갓의 모정에 장식한 옥로립(玉鷺笠)은 시임대신·원임대신·장신(將臣)이 의식 때에 융복이나 군복에 착용했고, 또한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이 착용하였다.

이와 같이 갓의 착용이 의례화되는 동시에 일반화되면서 갓을 쓰지 않을 때에는 갓집을 만들어 소중히 보관하였다. 갓집은 흔히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나 장식을 넣어서 아름답게 꾸몄는데, 주로 장농 위에 얹어두고 사용하였으므로 방안치레의 구실도 하였다.

참고문헌

『대동야승(大東野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하필기(林下筆記)』
『한국의 관모』(심재완·이은창, 영남대학교신라가야문화연구소, 1972)
『한국복식사』(석주선, 보진재, 1971)
『인간문화재』(예용해, 어문각,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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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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