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헝겊으로 만들었으나 옥·마노(차돌의 하나)·호박·산호·밀화·수정 등으로 만든 장식적인 갓끈도 있었다. 특히, 여름에는 깁으로 짠 것은 땀에 젖어 떨어지기 쉬우므로 호박·대모·수정·금패·연밥으로 만든 구슬 갓끈[珠纓]을 달았다.
구슬 갓끈은 갓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부분으로 대개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서 장식을 하였고 헝겊끈으로 턱밑에서 매어 고정시켰다.
금·은·옥 등으로 만든 갓끈을 꿰어 갓에 달았다. 또한, 갓끈은 신분이나 갓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였는데 당상관은 융복(군복의 하나)의 자립(紫笠)에 산호·호박·대모로 만든 갓끈[貝纓]을, 당하관은 융복의 흑립(黑笠)에 수정으로 만든 갓끈[晶纓]을 하였고, 전립에는 납조밀화(蠟造蜜花)를 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계절이나 갓의 종류에 따라 갓끈의 모양이나 재료를 달리하는 등 그 쓰임새가 사치스러워지자 금제(하지 못하게 말림)가 있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옥석·번옥·마노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외에는 금하고 향리는 옥·마노는 물론 산호·수정도 금하였다.
『경국대전』에도 당상관 이상의 갓끈을 모두 금·옥으로 제도화한 기록이 보인다. 연산군 때에는 주영(구슬을 꿴 갓끈)을 폐지하고 포백(베와 비단 종류)으로 고친 일도 있었으며, 중종 때에는 갓끈의 값이 비싸지자 없애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도 여전히 마노·호박·명박·산호·청금석으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이외에는 일체 금한다고 하였다.
『대전회통』에도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의 기록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구슬 갓끈은 변동없이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던 것 같다. 흥선대원군 집정시에는 의관문물의 간소화 시책에 따라 대나무를 사용하도록 하여 한때 대갓끈[竹纓]이 유행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