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병은 1910년(대한제국 융희 4)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일이다. 경술국치라고도 한다. 1910년 조선의 3대 통감으로 온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종래에 지니고 있던 사법·경찰권 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감은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했다. 22일 조약이 조인되면서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약 제1조에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경술국치 · 국권 피탈 · 일제 강점 · 일제 병탄 등으로도 불린다. 대원군 집정 이후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맞이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 · 경제 · 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승리함으로써 청나라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선은 일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일전쟁 직후 삼국 간섭 때부터 등장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이 이와 같이 배일친러정책을 표방하자, 일제로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일전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 · 미의 지지 하에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이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한국민의 항일투쟁을 탄압할 목적에서 ‘치안담당’을 구실삼아 1904년 7월부터 군사경찰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민은 경향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04년 8월 일제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고, 1905년 4월에는 ‘한일통신기관협정’을 맺어 우편 · 전신 · 전화 등 통신권을 피탈하였다. 나아가 한국 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 · 태프트밀약(桂太郎-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른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Portsmouth)강화조약 결과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 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 놓은 상황에서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어, 영국 · 청 · 미국 · 독일 등 주한 외국공관들도 철수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파견 사실을 안 일제는 7월 20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 한국의 내정권마저 장악하였다.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목적으로 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 활동을 한층 탄압하였다. 이어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장애였던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8월 1일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단행하였다.
이때 상당수의 한국 군인은 군대 해산에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된 의병 항전은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항전은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밀려 그 기세가 누그러진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하게 되었다. 한편, 안중근(安重根)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 침략의 원흉 이토를 총살,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였다.
그 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 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데라우치는 막바지 준비 작업으로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서둘러 정비하였다.
1907년 10월 일제는 한국 경찰을 일제 경찰에 통합시켰는데,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함으로써 종래의 사법 · 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그들 손아귀에 넣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시기만을 노리게 되었다.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일제는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뒤로 미루었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 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4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한국 통치의 총본산으로 삼았고,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를 임명하였다. 그 동안에도 일제 자본가들은 통감부의 보호와 원조를 배경으로 한국에서의 경제적 지배를 확립, 금융 · 광업 · 임업 · 어업 · 운수 · 통신 등 산업의 모든 분야를 완전 독점하고 말았다.
한편,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농업의 지배 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많은 토지를 탈취, 대다수의 한국 농민이 일제 수탈의 대상으로 화하고 말았다. 또, 1910년 12월에 내려진 「회사령(會社令)」은 한국인의 기업 설립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문화 · 교육면에 있어서도 한국 고유의 전통은 하나하나 파괴되어 갔으며,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으로 인해 한국민이 주체가 된 교육 기관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언론 · 출판 역시 단속이 심해졌다. 또한, 일어사용이 강요되고 일체 집회가 금지되어 한국의 민족 문화 및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