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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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용향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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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 사용하던 궁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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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 사용하던 궁중음악.
내용

일명 속악(俗樂)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에 당악(唐樂)이 유입된 뒤 외래의 당악과 토착음악인 향악을 구분하기 위하여 이름지어졌다.

이 후 중국과 계속되는 음악교류를 통하여 송나라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기존의 당악에 수용되고, 의식음악인 아악(雅樂)이 수입된 뒤로 궁중음악의 갈래는 아악과 당악·향악으로 나누어져 전승되었는데, 삼국시대 이후 조선 말까지의 향악용례 및 개념은 외래음악의 대칭어로서 한국전래음악을 지칭하였다.

이와 같은 향·당의 구분은 악기의 명칭에도 영향을 미쳐 당비파에 대한 향비파, 당피리에 대한 향피리와 같은 이름을 탄생시켰으며, 정재(呈才)의 경우에도 중국 전래의 것은 당악정재라 하는 것에 비하여, 한국전래의 것은 향악정재라 일컬어진다.

한편, 향악은 당악의 다른 명칭인 좌방악(左方樂)에 대하여 우방악(右方樂)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일본에서 당악은 좌방악으로, 삼국시대의 한반도 전래의 음악인 ‘고려악(高麗樂)’이 우방악으로 지칭되고 있는 점과 같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이와 같은 구분법은 조선시대에 들어 변화를 겪었다. 즉, 좌방의 자리는 고려시대에 수용된 아악이 차지하게 되고, 우방의 자리에 당악과 향악이 함께 합쳐진 것이다.

(1) 통일신라시대

당악의 대칭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통일신라의 향악개념은 한반도 토착음악과 통일신라 이전에 수용된 외래음악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향악잡영오수 鄕樂雜詠五首>는 당시 성행하던 다섯 가지 향악의 연희를 노래한 것인데, 이 중에 그 연원이 서역(西域)인 <산예 狻猊>와 한(漢)의 산악(散樂)인 <금환 金丸> 등이 들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이 시대에는 토착의 한국음악은 물론, 외래의 것이지만 이미 향악화된 음악까지를 포함하여 향악이라 일컫고, 이를 새로 수입한 당악에 대비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통일 이전의 신라음악은 가야금 중심의 음악이었는데 통일 이후의 향악은 삼현(三絃:가야금·거문고·향비파)·삼죽(三竹:대금·중금·소금)과 당악기인 대고(大鼓)·박판(拍板) 등을 첨가하게 되었다.

또한 악조면에서도 향악기연주에 당악의 악조가 사용됨에 따라 향악 자체의 음악내용이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거문고에는 평조(平調)와 우조(羽調)가, 향비파에는 궁조(宮調)와 칠현조(七賢調)·봉황조(鳳凰調) 등의 악조가 각각 사용되었다.

또한, 대금과 중금·소금에는 평조·황종조(黃鐘調)·이아조(二雅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출조(出調)·준조(俊調) 등 모든 7조가 연주되었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 문헌에는 한국전래의 궁중음악을 ‘향악’이라 지칭한 경우보다 속악이라고 일컬은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려사≫ 악지로서 여기에서 아악·당악·속악의 구분을 하고 있는데 속악이 곧 향악이다.

그런데 ≪고려사≫의 다른 부분 및 여타 개인문집 등에서는 속악과 병행하여 향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향악연주의 악기편성은 통일신라로부터 전승된 삼현·삼죽의 악기에 장구·해금·피리 등 외래악기가 첨가된 것이었다.

한편, 고려의 향악은 고려 전기(918∼1170)와 후기(1171∼1391)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전기의 향악은 통일신라로부터 전승된 것과 고려시대 창작의 향악이 포함된다.

≪고려사≫ 악지에는 신라전승의 음악 <동경 東京> 외 4곡과, 백제전승의 음악 <정읍 井邑>외 4곡, 고구려전승의 음악 <내원성 來遠城> 외 2곡 및 고려시대의 향악으로 <정과정 鄭瓜亭> 외 3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고려 전기의 향악은 양부악(兩部樂) 중 좌방악인 당악의 대칭으로 우방악으로 불렸다.

고려 후기의 향악으로는 한글 가사를 가진 <서경 西京> 이하 24편의 곡과 <풍입송 風入松>·<야심사 夜深詞> 등 한문가사를 가진 15곡이 ≪고려사≫ 악지에 전한다. 이 중의 일부악곡은 조선 초기까지 전해져 조선시대의 ≪시용향악보 時用鄕樂譜≫·≪금합자보 琴合字譜≫·≪대악후보 大樂後譜≫ 등에 수록되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향악전통은 궁중음악의 세 갈래인 아악·당악·향악의 하나로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의 향악과 당악은 양부악 중 우방악으로 합쳐짐에 따라 상호간에 음악적 영향을 받아 당악은 향악화과정을, 향악은 당악화과정을 보였다.

조선 초의 향악은 새로 창업한 조선의 역사적 당위성과 신왕조를 찬양하기 위한 신악(新樂) 제정사업의 일환으로 크게 진작된 바 있었다. 이 때의 음악내용은 대부분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향악에 기초한 것으로, 여기에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얹어 불렀기 때문에 향악 자체의 변화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신악부흥의 사업은 세종 때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일신을 보게 되는데, 그 주된 내용은 세종이 향악과 고취악을 참작하여 만든 <정대업>·<보태평>·<발상>·<봉래의>·<전인자>·<여민락>·<치화평>·<취풍형>·<후인자> 등이다.

이 중에서 <정대업>·<보태평>은 세조 때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향악의 주요곡이며, <여민락>도 많은 파생곡을 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성행하였던 조선시대 향악은 ≪대악후보≫·≪시용향악보≫·≪금합자보≫ 등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악보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삼국시대의 향악이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고려악의 경우 <정석가>·<한림별곡>·<사모곡> 등이 선조 무렵까지 전하였다. 이 밖에 조선 초에 제정된 <보태평>·<정대업>의 내용으로 채택된 고려의 향악 일부가 그 전승맥을 유지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당악의 향악화경향이 뚜렷해져서 음악내용의 변화는 물론, 악기의 사용면에서도 향악기와 당악기의 구분편성이 거의 모호해졌다. 오늘날의 음악 중 이상과 같은 향악전통을 잇고 있는 악곡으로는 종묘제례악의 <정대업>과 <보태평>·<여민락>·<수제천>·<취타>·<영산회상>이 대표적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음악은 ‘향악’이라는 명칭보다는 전통음악의 큰 범주로 악기편성의 특징에 따라 ‘향피리 중심의 음악’, ‘거문고 중심의 음악’ 등으로 구분되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문헌

『한국음악연구』(이혜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
『국악논고』(장사훈,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4)
『한국음악논고』(성경린, 동화출판공사, 1976)
『한국음악사』(장사훈, 정음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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