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전복의 형태는 대금이며 옷깃이 달리지 않은 둥근 형 혹은 ∨형이며, 어깨너비가 넓어 소매 같아 보이며 뒤트임과 옆트임이 있는 쾌자(快子)와 비슷한 옷이다.
전복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 영조 재궁의대(梓宮衣襨)에 전복 2점과 답호(褡護) 32점이 있고, 정조 재궁의대에는 답호와 쾌자가 기록되었고, 순조 재궁의대에는 쾌자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정조 이후 전복은 어깨좁은 쾌자와 같아져서 혼용되었다고 본다.
≪증보문헌비고≫에 오늘날의 전복은 옛날 반비(半臂)인데 일명 작자(綽子) 또는 답호라고 한다는 기록과 고종 25년(1888) 답호령을 내리고 전복을 입으라고 한 것은 잘못 됐다는 김영선(金榮善)이 올린 상소문이 있는데, 원래는 답호와 전복의 제도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전복이란 용어는 임진란 이후에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즉 ≪연려실기술≫ 별집 13권에 전립(戰笠)은 정묘호란 때에 무인(武人) 모두가 썼었던 전립(氈笠)의 다른 명칭인데 전립(戰笠)이라고 부른 것은 전쟁이 있을 징조라고 하였으며, ≪청장관전서 靑莊舘全書≫에도 우리 나라의 전립(氈笠)은 옛날에는 군사들만 썼으므로 전립(戰笠)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복이란 용어도 전립(戰笠)과 같은 시기에 생겼으리라고 추측 할 수 있으며, 갑옷과 군졸의 방위를 나타내는 호의(號衣) 등 더그레라고 칭했던 모든 것을 전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전복의 형태는 갑옷 중 대금 반소매 갑옷[頭釘甲, 鏡幡甲 등]과 대금 무수 갑옷[黃畫甲]과 호의가 모두 포함되다가 정조 이후 무수대금의 쾌자 하나로 집약되었다고 본다.
대금무수형의 갑옷은 ≪악학궤범≫의 황화갑으로 세종때 회례연(會禮宴)에 아악을 연극할 때 무무(武無) 공인(工人)이 입던 옷으로 어깨 너비와 넓은 품이 같아 입으면 반소매 같으며 무릎 위 길이이고 옷깃은 둥근, 전복의 초기형태이다. 겉감은 황색 초(綃), 안감은 홍색 주(紬)로 만들어 그림을 그린, 가장 기본적인 형이므로 일찍부터 입었을 것이다.
조선 통신사의 전복은 옷 길이가 길어졌고 어깨 너비가 넓어 어깨를 약간 덮었다. 이 시대의 유물로 증명된다. 김덕원(金德遠, 1634∼1704)의 전복은 ≪악학궤범≫의 황화갑 형태(넓은 품과 어깨너비가 같음)와 비교해보면 품이 좁아지면서 무가 첨가되었으며 좁아진 어깨너비는 쾌자보다는 넓어서 입으면 어깨를 약간 덮는데 어깨 너비가 품보다 좁아졌다. 정조시대 이후에 답호와 함께 쾌자형이 되었다.
호의는 더그레라고도 하며 하급군사들의 소속을 표시했던 3자락 옷이다. 대금에 옷깃을 Ⅴ자 혹은 둥글게 파준 옷으로 옆트임이 많아 활동이 많을 때에는 앞의 좌우 2자락을 뒤로 잡아 매었다. 품과 어깨너비가 같은 홑옷이며 말기에는 쾌자를 닮아갔다.
각 영문의 군사, 마상재군(馬上才軍)의 것은 소매가 없고, 사간원의 알도(謁道), 의금부의 나장(羅將)의 것은 짧은 소매가 있다.
한편 ≪악학궤범≫의 오색비단으로 만든 단갑(緞甲)을 전복의 기원으로 보는 설도 있다. 옷깃은 방령(方領)이고 대금이며 겉섶이 달렸고 쾌자형의 길에 반소매가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