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의의 개념으로는 갑주·군복 등이 포함되며, 협의의 개념으로는 철릭·광다회·목화·동개(筒箇)·입(笠)·환도(環刀)·병부주머니로 구성된 의복을 뜻한다. 이 융복은 문관이나 무관이 몸을 경첩(輕捷)하게 하여야 할 경우의 복장으로, 왕의 행차에 수행할 때,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국난을 당하였을 때에 착용하였다.
상고시대에는 갑주가 주로 융복으로 착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숭문사상의 발달로 갑주가 퇴화하여 품계가 높은 무관은 문관과 같은 복두(幞頭)·금표(金豹)·속대(束帶)를 하였다. 다만, 전쟁에 나갈 때에는 여전히 갑주를 입었다. 고려 중엽 이후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복식인 질손(質孫)을 채택하여 융복을 삼았다.
이는 철릭으로 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철릭은 상의하상(上衣下裳)이 연결된 겉옷으로 말을 타기에 알맞은 복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들도 그 간편함으로 상복을 삼았고 여기에 답호를 받쳐 입기도 하였다. 중종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하가 다 이 철릭을 입고 융사(戎事)를 하였으며 이후에 그 제도가 제식화되었다.
이 때의 융복은 육해 병사·우사(虞使) 등 호반의 복식으로 정립되어 철릭에 광다회를 매고 병부를 차고 입식의 전립(戰笠)을 쓰고 영자(纓子)를 하고 동개와 환도를 메고 목화를 신었다. 영조 때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품계를 색으로 구분하여 당상관은 자립에 패영을 하고 남색 철릭을 입도록 하였다.
당하관은 흑립에 정영(晶纓)을 하고 청현색 철릭을 입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다소의 변천은 있었다. 순조 이후에는 동달이라는 협수를 입고 답호를 걸치고 머리에 전립을 쓰고 환도·동개·등채(藤菜)를 하여 화려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구군복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