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향발(響鈸)이라는 작은 타악기를 좌우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각각 하나씩 매고, 장단에 맞추어 치면서 추는 춤이다.
1719년(숙종 45)의 『진연의궤』, 1744년(영조 20)의 『진연의궤』, 순조 이후의 각종 의궤에 빠지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향악정재 가운데에서 가장 즐겨 추던 춤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춤의 무보는 『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전한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무원은 8명이나 『정재무도홀기』에는 2명으로 되어 있다. 1828년(순조 28)의 『진작의궤』에는 2명의 무동(舞童)에 18명의 협무(挾舞)의 그림이 있고, 1829년의 『진찬의궤』에는 2명의 원무에 20명의 협무가 추는 그림과, 4명의 여기(女妓)의 춤도 보인다.
이 춤은 여기의 춤과 무동의 춤의 두 가지가 있었고, 무원의 수에도 변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 1893년(고종 30)의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당악정재인 「오양선(五羊仙)」의 창사를 부른 점에서는 『악학궤범』의 향발과 같으나, 향악정재의 특징인 면복흥(俛伏興)으로 시작하여 면복흥퇴(俛伏興退)로 끝맺는 전통적인 양식은 보이지 않으므로, 향악정재와 당악정재 양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춤의 반주음악은 『악학궤범』 시절에는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쓰였고, 『정재무도홀기』에는 「향당교주(鄕唐交奏)」가 쓰였다. 1829년의 『진찬의궤』에 의하면 무동의 복식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홍라포(紅羅袍) · 백질남선중단의(白質藍縇中單衣) · 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에 녹한삼(綠汗衫)을 매고, 학정대(鶴頂帶)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는다.
여기의 복식은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草綠單衣) · 황초단삼(黃綃單衫), 속은 남색상(藍色裳), 거죽은 홍초상(紅綃裳)에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띠고, 오채한삼(五彩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