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정재 ()

보태평지무
보태평지무
무용
개념
향악 반주곡에 맞추어 공연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궁중무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향악 반주곡에 맞추어 공연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궁중무용.
개설

향악정재는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도 당악정재와 더불어 궁중무용의 쌍벽을 이루었다. 『고려사』악지에는 향악정재라는 용어가 없고, 향악 항목 아래 정재 종목이 기재되었다. 당악이 넓은 의미에서 중국의 악(樂)을 뜻한다면, 향악은 우리 음악을 말한다. 원래 정재(呈才)는 기예를 드리는 것이었으나, 이후 궁중무용의 대명사처럼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당악정재에 대응하는 고려의 향악정재는 「무고(舞鼓)」·「동동(動動)」·「무애(無㝵)」이며, 11세기 이후에 궁중무용으로 창제되었다. 당악정재와 비교할 때, 고려 향악정재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교방 기녀를 무대로 인도하는 죽간자(竹竿子)가 없다. 둘째로 정재 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노래부르는 한문가사의 치어와 구호가 없다. 셋째로 공연 도중에 기녀들이 부르는 창사의 가사가 한문이 아닌 국문이다.

조선 전기의 향악정재는 고려 때의 것을 전승한 종목과 건국초기에 창제된 종목으로 구성된다. 고려의 세 향악정재 가운데 「무고」와 「동동」만이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고, 「무애」는 제외되었다.

조선 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는 모두 8종목이다. 건국 초 세종 때 창작된 향악정재는 「봉래의(鳳來儀)」·「보태평(保太平)」이고, 성종 때 창작된 향악정재는 「향발(響鈸)」·「학무(鶴舞)」·「교방가요(敎坊歌謠)」·「문덕곡(文德曲)」·「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이다.

조선 전기 창사의 특징은 동동사와 정읍사같은 고려가요를 비롯하여 정대업·보태평·치화평·취풍형·봉황음의 악장 및 본사찬·관음찬·미타찬같은 불가를 포함했다는 점이다. 「봉래의」는 향악정재임에도 당악정재의 형식요소인 죽간자가 등장했으며, 「문덕곡」도 치어나 반주음악은 당악정재 양식을 따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새로 등장한 향악정재로 순조대 이전을 살펴보면, 지방 교방에서 먼저 공연되다가 정조대에 궁중으로 올라온 「선유락(船遊樂)」과 「검기무(劍器舞)」를 비롯하여 「광수무(廣袖舞)」·「초무(初舞)」·「첨수무(尖袖舞)」가 있었다.

순조대에 창작된 향악정재는 19종목으로,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경풍도(慶豐圖)」·「만수무(萬壽舞)」·「망선문(望仙門)」·「무산향(舞山香)」·「박접무(撲蝶舞)」·「보상무(寶相舞)」·「사선무(四仙舞)」·「영지무(影池舞)」·「첩승무(疊勝舞)」·「춘대옥촉(春臺玉燭)」·「춘앵전(春鶯囀)」·「헌천화(獻天花)」·「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연화무(蓮花舞)」·「춘광호(春光好)」·「침향춘(沈香春)」·「향령무(響鈴舞)」이다.

헌종대에는 지방에서 공연되던 「관동무(關東舞)」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고종대에는 「항장무(項莊舞)」가 1873년(고종 10) 평안도 선천에서 궁중으로, 성천의 잡극인 「사자무(獅子舞)」가 1887년(고종 24)에 궁중에서 공연되었다. 이는 민간의 연희가 궁중정재로 자리를 잡게 된 사례이다.

조선 후기 향악정재는 조선 전기와 다른 특징이 있다. 첫째, 순조대에 새로운 정재가 많이 창제되었다. 둘째,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당악정재는 죽간자만이 남아서 구분될 뿐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향악정재화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향악정재에서는 한시 창사(唱詞)가 새로 마련되기도 해서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특징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셋째, 「춘앵전」이나 「무산향」 같은 독무가 출연했다. 넷째, 조선 전기 악기 편성의 용어였던 향당교주가 1719년(숙종 45)부터는 정재반주의 한 악곡명으로 사용되었다. 다섯째, 1828(순조 28)부터 정재반주곡의 아명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향악정재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의 교방에서도 지속적으로 공연되었다. 고종대 의 기록인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 진주 교방에서 공연된 향악정재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공연된 향악정재로는 「무고」·「검무」·「선락(船樂, 선유락)」·「항장무」였는데, 춤 절차와 무대도구 및 의상이 궁중에 비해 간소한 형태였다.

고려시대의 향악정재

고려 향악정재 3종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무고

고려 충렬왕 때 시중(侍中) 이곤(李昆)이 강원도 영해에 유배되었을 때 바닷가에 떠다니던 뗏목을 주워서 만든 큰 북에서 유래되었다. 북 주위를 즐겁게 돌아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마치 한 쌍의 나비가 펄렁펄렁 날아서 꽃 주위를 감도는 것 같고, 춤추다가 두드리는 북소리는 두 마리의 용이 구슬을 굴리는 것 같다고 『고려사』 악지에 전한다. 역대로 가장 인기리에 공연되었던 정재이다.

  1. 동동

「동동사(動動詞)」를 노래하며 춤추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449년(세종 31) 10월까지도 동동정재의 이름이 보이나, 그 뒤 『악학궤범』에서는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상아로 만든 작은 박(拍)을 장단에 맞추어 치는 무구(舞具)의 이름으로 바꾸어 아박(牙拍)이라 하였다.

  1. 무애

신라시대에 원효가 불교의 민중 포교를 위해 불렀다는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아무 꺼릴 것이 없는 사람은 한 가지 도(道)로써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의 한 구절을 노래했다. 『고려사』 악지에는 서역에서 나왔는데, 가사에 불가어(佛家語)를 많이 쓰고 방언이 섞여 있다고 하였다. 세종 이후 자취를 감추었는데, 1829년(순조 29)에 새로운 창사로 다시 재현되었다.

조선 초기의 향악정재

조선 초기에 창작된 향악정재 7종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태평

1447년에 세종이 조종(祖宗)의 문덕(文德)을 기리기 위해 직접 지은 악무(樂舞)이다. 세종 때의 「보태평」은 11곡으로, 1463년(세조 9)에 최항(崔恒)에게 가사와 곡조를 줄이게 하고 조(調)를 바꾸어 1464년 정월부터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1. 정대업

「보태평」과 아울러 1447년에 세종이 조종의 무공을 찬미하기 위하여 지은 악무이다. 세종 때는 15곡으로 되어 있었으나, 1463년최항이 그 가사를 줄이고 곡도 줄이는 동시에 그 곡수도 11곡으로 삼았다. 「정대업」은 무무(武舞)로서 육일무(六佾舞)였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원진(圓陣)·방진(方陣) 등 진법에 따라 각종 의물을 든 35명이 동·남·서쪽에 도열한 가운데 36명이 칼·창·활 등을 들고 춤추었다. 무보는 국립국악원 소장 『시용무보(時用舞譜)』에 전한다.

  1. 봉래의

「용비어천가」를 노래하며 추는 춤으로, 1445년 4월 이후에 제정된 무악(舞樂)이다. 『세종실록』 권140∼145에 「봉래의」 악보가 전한다. 악보에 따르면, 전인자(前引子:전주곡)·진구호(進口號)·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후인자(後引子)·퇴구호(退口號)로 구성되어 있다.

  1. 향발무

조선 초기에 창작된 춤으로, 8명이 향발(響鈸)을 두 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매어 이를 치면서 추는 춤이다.

  1. 학무

지당판(池塘板) 위에 연통(蓮筒)을 만들어놓고 그 연통 속에 동녀(童女)를 숨겨두고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이다. 두 학이 춤추고 놀다가 연통을 쪼아 연통이 벌어지면 그 속에 숨어 있던 두 동녀가 나오는데 두 학은 이를 보고 놀라 퇴장하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고종대의 『정재무도홀기』에는 청학·황학으로, 『교방가요』에는 백학 한쌍이 공연하는 것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학의 탈의 빛깔이 달라졌을 뿐, 춤의 구성과 내용은 같다.

  1. 처용무

『고려사』 악지에는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충혜왕 신우조(辛禑條) 등에 처용희(處容戱)를 즐겼다는 기록이 보이고, 「처용무」는 원래 한 사람이 흑포사모(黑布紗帽)하고 추었다고 『용재총화(庸齋叢話)』에 전한다. 조선 초기에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구성되었다.『악학궤범』에는 더욱 발전하여 전도(前度)와 후도(後度) 두 차례 춤을 추고, 후도에서는 「학무」가 합설(合設)되고, 미타찬(彌陀讚)·본사찬(本師讚)·관음찬(觀音讚) 등을 노래하는 불교적인 내용을 가미하였다.

  1. 교방가요

하나의 독립된 정재라기보다 임금의 대가(大駕)를 맞는 행로에서 가요(歌謠)를 올릴 때, 학무와 연화대 정재 등을 올려 즐겁게 하는 하나의 행사이다.

  1. 문덕곡

향악정재로 되어 있으나 특이하게 음악은 당악(唐樂)인 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을 연주한다. 태조의 문덕을 칭송한 개언로장(開言路章)·보공신장(保功臣章)·정경계장(正經界章)·정례악장(定禮樂章) 등 노래가 중심이다.

조선 후기의 향악정재

조선 후기 순조대 이전에 창작된 향악정재 5종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검기무

연원은 신라 때의 황창랑(黃倡郞)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지역 교방에서 활발히 공연되다가 궁중에 유입된 시기는 정조대이다. 이 춤에서 가장 어렵고 볼만한 사위는 허리를 뒤로 제치며 공중에 나는 듯 빙빙 도는 연풍대(筵風擡)이다.

  1. 첨수무

검기무와 춤사위가 같으나, 첨수(尖袖)라고 하는 뾰족한 소매형태를 한 무구를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속칭 「엽무(葉舞)」라고 한다.

  1. 초무

숙종대 진연에 무동만 공연한 정재로, 무동무동 2인이 북향하여 손을 바꿔가며 이마에 손을 올리면서 춤추는 간단한 춤이다. 이름은 「초무」이지만, 반드시 연향의 첫 순서에 공연된 것은 아니다.

  1. 광수무

숙종대 진연에 등장하여 무동만 공연한 정재로, 무동 2인이 넓은 소매를 이용하여 한 손은 소매를 들고, 한 손은 소매를 떨어뜨리는 것이 주요한 동작이다.

  1. 선유락

신라의 뱃놀이에 유래를 두었다. 군례(軍禮)의 형식을 띠며, 정재로서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무이다. 지역 교방에서 활발히 공연되다가 궁중에 유입된 시기는 정조대이다.

순조 시대의 향악정재

순조대 창작정재 중에 효명세자가 창사를 지은 향악정재 13종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인전목단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모란을 꺽는다’는 제목처럼 무대 중앙의 모란꽃병에 모란꽃을 꽂아놓고 한 가지씩 취하여 즐기는 춤이다.

  1. 경풍도(慶豊圖)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당시에는 연이은 흉년으로 민심이 도탄에 빠질 지경이었는데, 「경풍도」는 풍년을 기원하며 국한문 창사를 노래한다.

  1. 만수무(萬壽舞)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춤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당악정재인 「헌선도」의 춤절차와 흡사하며, 선모 1인, 협무 4인으로 구성된다. 한문 창사와 국한문 창사를 노래했다.

  1. 망선문(望仙門)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무동 4인이 작선(雀扇)을 들어 선문(仙門)을 만들면, 당(幢:새털로 만든 휘의 일종)을 든 무원 2인이 문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춤춘다.

  1. 무산향(舞山香)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효명세자가 창사를 지었으며, 「춘앵전」과 같은 독무로 침상(寢床)의 모양의 대모반(玳瑁盤) 위에서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춤춘다.

  1. 박접무(撲蝶舞)

‘나비가 날개짓한다’는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나비가 날개짓하는 음력 2월 15일에 봄기운을 맞으며 나비놀이를 하는 세시풍속이 담겨있다. 복식에 꽃과 나비를 군데군데 수놓아 봄빛을 찾는 범나비를 상징하였다.

  1. 보상무(寶相舞)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두 대(隊)로 편을 나누어 보상반(寶相盤)에 채구(彩毬)를 던지는데, 채구를 반(盤)에 넣으면 봉화(奉花)가 상으로 꽃을 주고, 넣지 못하면 벌로서 봉필(奉筆)이 얼굴에 먹을 찍는다. 당악정재인 「포구락」을 본받은 춤이다.

  1. 사선무(四仙舞)

‘네 신선의 춤’이라는 제목으로 1829년(순조 29) 2월 진찬에서 초연되었다. 네 신선은 신라의 화랑인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인데, 함께 산수를 유람해서 사선으로 불렸다. 이들이 와서 놀 만큼 태평성대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연꽃을 든 2명이 앞에서 1대를 만들고, 그 뒤에 4명이 2대를 만들어 북향하여 춤춘다.

  1. 영지무(影池舞)

‘연못 그림자 춤’이란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무대 가운데 네모난 연못 모양인 영지를 설치하고, 영지를 중심으로 춤대형이 구성된다. 영지를 향하여 춤추는 동작이 대표적이다.

  1. 첩승무(疊勝舞)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노래가 중심인 정재로 6인의 무원이 제일첩(第一疊)에서 제십첩(第十疊)까지 칠언 한시를 노래한다.

  1. 춘대옥촉(春臺玉燭)

‘춘대에 임금의 덕화가 두루 미친다’는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춘대는 창경궁의 춘당대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무대 중앙에는 춘대를 상징하는 윤대(輪臺)가 설치되었다. 윤대 위에 무동 4인이 보등(寶燈)을 잡는데, 3인은 앞에 서고 1인은 뒤에 서서, 서로 선전(旋轉)하며 춤춘다. 당(幢)을 든 2인은 뒤쪽 좌우에서 춤춘다.

  1. 춘앵전

‘봄에 꾀꼬리가 지저귄다’는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원래는 당나라 고종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악공 백명달(白明達)에게 명해 그것을 모사하게 했다는 유래가 있다. 화문석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한없이 느리게 추는 우아한 춤이며, 우리나라 전통춤 가운데서도 백미이라고 할 수 있다.

  1. 헌천화

‘천화(天花)를 바친다’는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천녀가 천화를 뿌리는 산화공덕(散花功德)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선모 1인이 화병을 받들고 나아가 헌화탁에 놓는 것이 주요 동작이다.

순조대 창작정재 중에 효명세자가 창사를 짓지 않은 향악정재 6종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구려무(高句麗舞)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고구려’ 시를 창사로 썼다.

(2) 공막무

‘공은 그러지 마시오’라는 제목으로 항장(項莊)이 검을 휘두르며 춤추자 항백(項伯)이 소매로 그것을 막은 고사를 차용하여 만든 정재이다.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창사가 없는 검무계열의 춤으로 전복(戰服)을 입은 무동 2인이 각기 검 두 개를 들고 상대하여 춤추는데, 검기무와 춤사위가 같다.

(3) 연화무

‘연꽃 춤’이란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연꽃이 들어 있는 병 6개를 무대 앞에 설치한 뒤에 한 가지씩 취하여 춤을 추는 구성이다. 「연화대」의 변형된 형태이다.

(4) 춘광호(春光好)

‘봄빛이 좋다’는 제목의 정재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무원은 북쪽에 2명, 남쪽 2명, 동쪽에 1명, 서쪽에 1명씩 늘어서서 춘다. 화사한 봄빛을 즐기는 내용이다.

(5) 침향춘(沈香春)

‘봄향기에 젖어든다’는 제목으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당나라 현종이 침향정에 모란꽃을 심어 만발하게 피었다는 고사가 있다. 고사의 내용과 유사하게 모란화병(牡丹花甁) 2좌를 앞에 설치하고, 무동 2인이 화병의 꽃 한가지를 취하여 상대하며 춤춘다.

(6) 향령무(響鈴舞)

‘방울을 울린다’는 제목의 정재로 1828년(순조 28) 6월 진작에서 초연되었다. 금방울 10개를 좌우 손에 묶어 매달아서, 박(拍)에 맞추어 손뼉을 치고 돌며 소리나게 한다. 6명이 품(品)자 모양으로 벌려 서서 가곡 계락(界樂)의 노래를 부르며 장단에 맞추어 춤춘다.

조선 말기의 향악정재

헌종대와 고종대 민간에서 궁중으로 유입된 향악정재 3종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관동무

정철(鄭澈)이 관동절(關東節)에 『관동별곡』을 지어 무기(舞妓)로 하여금 노래하며 춤추게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춤은 1848년(헌종 14)의 『진찬의궤』에 처음 보인다. 8명이 두 대(隊)로 나누어서서 관동별곡 1·2·3단을 노래하며 춤춘다.

  1. 항장무

중국 진(秦)나라 말기 홍문(鴻門)에서 잔치가 열렸을 때, 항우(項羽)의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칼춤을 추게 하여 유방(劉邦, 한왕)을 죽이려 하자 유방 측의 항백(項伯)이 옷소매로 이를 막았다. 이러한 내용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항장무」는 지방의 교방에서 유행하였는데, 1873년에는 평안남도 선천 지방의 「항장무」가 궁중에 소개되었다.

  1. 사자무

1887년(고종 24)에는 성천 지방에서 연행되던 사자춤이 처음으로 궁중에서 공연되었다. 사자탈을 쓰고 춤추는 사자춤은 다른 정재와 달리 여령이나 무동이 아닌 재인이 공연을 담당했다.

현황

국립국악원 소장본 『정재무도홀기』에는 무보가 전하지 않는 정재종목도 있었는데, 장서각 소장본 『정재무도홀기』에는 모든 정재의 무보가 전한다. 현재 대부분의 향악정재가 『정재무도홀기』를 토대로 재현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에 나타난 향악정재는 고려시대 새로 등장한 형태의 궁중 공연물이라는 점, 향악정재의 반주곡이 향악이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의 향악의 전승에 이바지 했다는 점, 향악정재의 창사에는 「동동사」와 같은 국문학적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교방가요(敎坊歌謠)』
『악학궤범(樂學軌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진작의궤(進爵儀軌)』(1828)
『진찬의궤(進爵儀軌)』(1829)
『진연의궤(進爵儀軌)』(1901, 1902)
『증보 한국음악통사』(송방송, 민속원, 2007)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국악편』(송혜진, 두리미디어, 2007)
『정재연구Ⅰ』(정은혜, 대광문화사, 1996)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7)
「순조대 정재 창작양상」(조경아, 『한국음악사학보』31, 2003)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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