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직은 일제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이다. 일본의 왕실봉작에 따라 구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로 편입하고, 고종을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으로, 순종을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봉작하였다. 대한제국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황실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의 업무를 인수하기 위해 제정된 기구로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의 궁내성에 소속되었다. 일본 천황-궁내성-이왕직의 계통을 갖는 행정조직이어서, 이왕직 관원의 임명·상벌 등은 일본 궁내성 대신의 소관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일본 천황의 통솔을 받도록 하였다.
이왕직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姓)인 전주 이씨를 지칭하고,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爵位名)을 의미하며, 직(職)은 업무를 담당하는 직관(職官)이란 의미이다. 일제하의 조선 왕실을 이왕가로 부르는 이유는 고종과 순종이 일본의 왕(王) 작위를 받았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일제에 의해 공(公)의 작위를 받은 이희공(李憙公)과 이강공(李堈公)의 가문을 공가(公家)라 하는 것과 같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하면서 구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로 편입, 고종과 순종에게 왕의 작위를 수여하여 고종을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으로, 순종을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봉작하였다. 그리고 이희 · 이강 등 이왕가의 가까운 친척들은 그 친소에 따라 공(公) · 후(侯) · 백(伯) · 자(子) · 남(男) 등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일본의 왕실봉작제에 의하면, 천황의 아들대부터 현손에 이르는 유복친(有服親)의 남계 후손(男系後孫)은 친왕(親王)으로 봉작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5대 이후의 남계 후손은 왕으로 봉작하였다. 이왕직은 바로 일제가 자신들의 왕실봉작제를 이용해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로 편입, 이들을 예우하는 한편 회유 ·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였다.
이왕직 관제는 1910년 12월 30일에 발표된 ‘황실령(皇室令) 제34호’에 의해 공식적으로 재가되었다. 이왕직이 설치됨에 따라 기존의 궁내부 업무는 자연히 이왕직으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이왕직이 업무를 개시하기 하루 전인 1911년 1월 30일 구궁내부의 모든 직원들은 해직되고 업무도 정지되었다. 이때 해직된 구궁 내부 직원은 326명, 고용직으로 있다가 해직된 사람은 34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의 관제에 의하면, 이왕직에는 최고책임자로서 장관(長官) 1명, 차관(次官) 1명, 사무관(事務官) 36명, 찬시(贊侍) 12명, 전사(典祀) 8명, 전의(典醫) 6명, 기사(技師) 3명, 이외에 속(屬) · 전사보(典祀補) · 전의보(典醫補) · 기수(技手) 등이 소속되었다. 이왕직관원의 봉급은 일본의 궁내관관등봉급(宮內官官等俸給)에 의거하였고, 인사 문제는 궁내관임용령(宮內官任用令)에, 업무 문제는 궁내관분한령(宮內官分限令)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는 이왕직이 궁내성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이왕직에 조선 역대의 왕릉을 관장하는 참봉(參奉) 75명을 배속시켰다. 이왕직의 사무와 직원 및 재정 문제에 대하여는 조선총독이 현지에서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왕직 직원의 수는 창덕궁의 순종 처소에서 근무하던 97명을 비롯해, 고종에게 파견된 34명, 왕세자에게 파견된 6명, 이희공에게 파견된 7명, 이강공에게 파견된 7명을 포함, 총 198명에 달하였다.
이왕직이 구궁내부의 각종 업무를 접수하여 일을 보기 시작한 날짜는 1911년 2월 1일부터였다. 이때 초대 이왕직장관에는 민병석(閔丙奭)이, 차관에는 고미야(小宮三保松)가 임명되었으며 서무계(庶務係) · 회계계(會計係) · 장시계(掌侍係) · 장사계(掌祀係) · 장원계(掌苑係) 등 다섯 개의 계가 설치되었다. 이 기구들의 사무분장은 다음과 같다. 이때 규정된 이왕직의 직제는, 이후 주전과(主殿課) · 영선과(營繕課) · 의식과(儀式課) 등이 때에 따라 설치되거나 폐지되었으나 이때의 골격을 기본으로 일제 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이왕직이 관할하는 이왕가에는 순종 이외에도, 고종 · 왕세자(후의 英王) · 이희공(李熹公) · 이강공(李堈公)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거주하는 곳이 달랐다. 이에 따라 이왕직은 고종 · 왕세자 · 이희공 · 이강공의 거처에 일종의 파견소를 설치, 이들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왕직은 직접적으로는 궁내부의 업무를 인수하기 위해 제정된 기구이다. 따라서 이왕직의 기본적인 업무나 기능은 궁내부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예컨대 이왕직 내직소(內職所)에서 작성한 순종의 『일기(日記)』와 덕수궁찬시실(德壽宮贊侍室)에서 작성한 고종의 『일기(日記)』는 바로 국왕의 일상을 기록하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외에 이왕직은 이왕가에 관련된 문서업무를 관장하여,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편집했고, 이왕가족보를 작성했으며, 고종과 순종에 관련된 『일성록(日省錄)』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이왕직은 구궁내부의 업무와 기능을 접수하여 이왕가의 인적 사항 · 재산 · 제사 · 도서 · 동물원 · 식물원 · 박물관 등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황실이 망국과 동시에 이왕가로 격하됨에 따라 이왕직의 조직이나 기능은 구궁내부에 비해 현격하게 축소되었다.
조선이 독립국이었을 때는 궁내부의 인사권 · 예산편성권 등을 고종이 장악하였지만, 망국의 왕인 고종이나 순종은 이왕직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이왕직 관원의 임명 · 상벌 등은 일본 궁내성 대신의 소관으로, 동시에 조선총독의 감시를 받았다. 따라서 이왕직은 일본 천황-궁내성-이왕직의 계통을 갖는 행정조직이어서, 이왕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은 이왕직을 통해 궁내부에 보고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천황의 통솔을 받았다. 요컨대 이왕직은 일제하의 이왕가를 예우함과 동시에 관리 ·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