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상은 조선후기 경주부윤, 제주목사, 영광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53년(효종 4)에 태어나 1733년(영조 9)에 사망했다. 1677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동성혼인을 금지하고, 광정당(廣靜堂)을 비롯한 산당을 불태우고 나체로 잠수하는 해녀를 위해 해녀복을 제작하는 등 제주의 풍속을 유교의 방식으로 바꾸었다. 1818년(순조 18) 제주 유생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영혜사에 추향하였다. 142종 326책의 저술을 남겼는데 『탐라순력도』 및 『남환박물』은 제주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 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며, 이사민(李師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장형(李長馨)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주하(李柱厦)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호조좌랑 재직시 청나라에 바치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 바쳐온 보포(報布)보다 9척이나 긴 것을 알고, 이것이 앞으로 무궁한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리고 보내었다.
성주목사 때에는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해 관비로 교육시켰으며,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해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사적을 길이 남겼다. 한편 파괴된 채 방치되던 독용산성(禿用山城)을 민정(民丁)을 차출해 3일 만에 완축시켰다.
동래부사 때에는 이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방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많은 폐단을 일으키는 일본의 구송사(九送使)를 폐지시켰다. 1691년 양주목사로 부임하였으며, 임지에서 치적을 쌓아 공덕비가 세워졌다. 경주부윤 때에는 운주산(雲住山)의 토적 수천 명을 해산시켰다.
또한 향교와 서원에 교유(敎諭)해 학풍을 진작시키고, 향약 ·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강화해 향촌질서를 세우는 한편 충 · 효 · 열을 민간에 장려해 유교적 도덕정치를 실시하였다.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로 부임해 제주의 풍속을 유교의 방식으로 바꾸어 나갔다. 즉,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던 삼읍(三邑)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이름 높은 선비들을 선생으로 정해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고을나(高乙那) ·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삼성의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인 등의 풍속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지방민들이 제주도 남부에 있는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인 광정당(廣靜堂)에서 기도하던 풍습을 금지시키고, 이 밖에도 신당 129개를 모두 불태웠다. 또한 미신적으로 흐르는 불교를 배척해 두 사찰을 불태우고 유교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해녀복을 고안, 제작하여 착용시켰다.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국가유산과 고적을 수리, 보존했으며,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해 도민(島民)의 풍속 교화와 생활 개선에 힘썼다. 이에 당시 백성들은 이 목사의 공덕비(功德碑) 4기(基)를 세워 그의 청덕(淸德)을 칭송했다 한다.
그 뒤 영광군수로 부임했으나 사임하고,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30여 년간 초야에 있다가 1728년(영조 4)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로 대구감영(大邱監營)에 부임, 그 해 소론 일파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해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733년(영조 9)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35년 경상도 영천의 성남서원(城南書院)에 제향되었고,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올랐다.
1818년(순조 18) 제주 유생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병와집』 18권을 손자인 만송(晩松)이 간행하였다. 이 밖에도 『둔서록(遯筮錄)』 · 『악학편고(樂學便考)』 · 『강도지(江都志)』 · 『악학습령(樂學拾零)』 · 『선후천(先後天)』 등 142종 326책의 저술과 3,886수의 시가 있다.
목민관으로서 활동 중 제주도에 관한 기록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및 『남환박물(南宦博物)』은 제주의 인호(人戶) · 인구(人口) · 전(田) · 국마(國馬) · 국우(國牛) 등 상세한 통계 자료를 담고 있어 제주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고 중 10종 15책은 1979년 보물로, 유품 12종 59점은 1982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