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

조선시대사
단체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에서 갈려 나온 당파.
내용 요약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에서 갈려 나온 당파이다.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정탐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노장파 인사들이 소장파 관료들의 배척을 받은 것을 계기로 성립되었다. 노론은 격화되는 당쟁의 와중에 숙종~경종 대에 수차례 화란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훈척가의 영향력과 송시열·송준길 등에서 연원한 문인 집단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회복, 확장하여 조선 말까지 조정의 주도 세력 지위를 유지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에서 갈려 나온 당파.
연원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은 외척 김석주 · 김익훈이 숙종의 위임으로 무리한 정탐을 통해 허적 · 윤휴 등 집권 남인 세력을 복선군 등 종친 세력과 연계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역모를 시도하였다는 혐의로 쫓아낸 사건이다. 이후에도 잔당을 몰아내기 위한 이들의 정탐 정치는 지속되었다.

노론인조 대 이래 김상헌 등 청서(淸西)의 척화론자를 중심으로 김장생- 김집- 송시열 · 송준길의 산당(山黨) 학통의 인사들이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고, 산당계 척신인 김만기 · 민유중이 그간 송시열과 불화했던 한당(漢黨)의 훈척인 김석주까지 끌어들여 세력을 확장 · 강화한 것이다. 삼척가(三戚家)와 양송(兩宋)은 노론의 핵심 가문이다.

척신의 정치 간여 차단을 바랐던 소장파와 달리 송시열은 정탐이 불가피했던 사정과 현명한 척신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대명의리(對明義理)를 강화하기 위해 효종 세실론과 태조 시호 추상 등 예제 정비에 주력하고, 허적 · 윤휴 · 허목 등이 이끌던 남인을 정국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송시열은 주자를 함부로 비판하며 자기 견해를 앞세우는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며, 주자 절대주의에 입각한 엄정한 연구를 선도하였다. 후대의 노론 인사들 역시 이러한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현황 및 변천

노론은 숙종이 후궁 장희빈의 소생을 성급하게 원자(元子)로 정하는 데 항거하다가 일거에 축출되는 기사환국(1689년, 숙종 15)의 위기를 맞았다. 숙종은 재진출한 남인의 방조하에 인현왕후 폐출까지 감행하였고 송시열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노론 외척 김춘택은 소론과 함께 폐비(廢妃) 복위를 시도하다가 남인의 정탐으로 고변(告變) 당하였으나, 숙원 최씨를 통해 숙종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여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을 이끌어 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는 ‘탕평’ 정국에서 노론은 인현왕후를 해치려 한 장희빈 남매 및 이들의 정치적 기반인 기사남인 세력도 배제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들에게 온정적이던 소론과 대립하였다. 아울러 그간 누적되던 송시열과 윤증 간의 사문(斯文) 시비가 격화되었다. 그 일환으로 노론은 주자 절대주의에 입각하여 박세당최석정의 저술까지 배척하였다.

그동안 세자 보호 차원에서 노론 · 소론을 병용 · 존중하던 숙종은 정신 질환을 앓던 세자 교체를 염두에 두고 병신처분(숙종 42)을 내렸다. 이는 송시열이 옳고 윤증이 잘못이라는 판정이며, 노론의 독주를 용인하는 환국으로 이어졌다.

소론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노론의 정승 이이명은 정유년(숙종 43) 숙종과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포함한 숙종의 후계 문제를 논의할 정도로 정국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노론은 경종대에 ‘사화(士禍)’로 지칭될 정도의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노론은 경종에서 연잉군(후일의 영조)으로 원만한 계승을 위하여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경종의 국구인 어유구와 연결된 김일경 등 소론 급진파와 준론이 일으킨 신임옥사(辛壬獄事)에 휘말려 노론 4대신과 그 자제들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 역모 혐의로 대거 처형되었다. 그러나 노론이 지원하던 세제가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여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조는 노론 · 소론 간 ‘탕평’을 본격 추진하였고, 1722년(경종 2)의 임인년 옥사는 무옥(誣獄)이므로 노론 · 소론이 신임옥사의 충 · 역론을 합의하여 정하도록 유도하였다. 그 합의는 수차례의 변경 끝에 1755년(영조 31) 소론 준론이 연루된 역모 사건인 을해옥사를 계기로 노론이 충이며 소론이 역이라고 확정되었다. 이로써 노론은 충역론에서도 승리하여 완전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노론의 신임 의리는 조선 말까지 확고한 국시가 되었다.

을해옥사 이후 노론의 독주가 분명해지자, 노론은 세자와 협력 · 갈등 관계 및 탕평의 방향을 둘러싸고 재차 분화하여 북당(北黨) · 동당(東黨) · 남당(南黨)이 형성되었다. 홍봉한의 북당은 세자 보호를 위해 탕평에 적극적이며, 김귀주의 남당은 반 세자의 구심으로서 노론 일당화에 적극적이었으며, 두 척신에 비판적인 관료 중심의 동당에는 양 노선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는 정조~순조 6년까지 노론 시파벽파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숙종 대 이래 국정을 주도했던 노론의 청풍 김씨( 김우명 형제, 김석주), 광산 김씨( 김익희), 여흥 민씨( 민유중 형제), 안동 김씨( 김수항) 등 가문은 영조대 탕평 정국을 거치면서 경화(京華)의 벌열이 되었다. 정조 대에 이들은 노론 신임 의리 가문으로 지칭되며 견제도 당했지만, 순조대 이후 국왕권을 위축시키면서 일부 소론을 참여시켜 세도 정치를 주도하였다.

순조 대에서 헌종 대까지는 안동김씨에 맞서서 반남박씨와 풍양조씨가 도전하고, 철종 대에는 안동김씨가 독주하는 형태였다. 노론은 대원군의 섭정 때 종친 세력 및 소론 · 남인 · 북인의 약진으로 위기에 처하였으나, 고종의 친정으로 노론 벌열의 후예인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재차 결집하여 국정을 주도하였다.

의의 및 평가

노론은 숙종대 이후 인조반정 주체 세력의 ‘무실국혼(無失國婚) 숭용산림(崇用山林)’이라는 밀약을 성공리에 수행하였기에 왕실과 일체감이 있었고, 이로 인해 여러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현명한 척신들’의 후원으로 주도권을 회복하고 더욱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노론은 조선 왕실과 영욕을 함께한 붕당이었다.

조선 망국의 책임 때문에 노론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나, 조선 후기 정치 · 사회 ·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론의 동향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참고문헌

원전

『경종실록(景宗實錄)』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당의통략(黨議通略)』
『숙종실록(肅宗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단행본

최성환, 『영 · 정조대 탕평정치와 군신의리』(신구문화사, 2020)
이상식, 『조선후기 숙종의 정국운영과 왕권 연구』(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지식산업사, 2003)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지식산업사, 1997)
김세봉, 『17세기 호서산림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이성무 · 정만조,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논문

정만조, 「17세기 중반 한당의 정치활동과 국정운영론」(『한국문화』 23,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9)
성낙훈, 「한국당쟁사」(『한국문화사대계』 2,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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