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 ()

조선시대사
단체
조선 후기, 영조의 정치적 처분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나누어진 정파의 하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벽파는 조선 후기, 영조대 노론 남당(南黨)의 계승자로서, 군주와 그 뜻에 순응하는 시파에 맞서 궁벽한 처지에서도 노론 의리를 고수한다고 자처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조 대 후반에는 정조의 의리 변통 시도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대 초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과도하게 토역론(討逆論)을 관철시키다가 왕실과 노론 시파는 물론 소론 신료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급속히 세력을 잃었다.

정의
조선 후기, 영조의 정치적 처분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나누어진 정파의 하나.
연원

벽파(僻派)는 영조가 확립한 신임의리와 영조의 임오의리를 변경하려는 정조시파의 견제를 받는 궁벽한 처지에서도 노론의 의리를 고수한다고 자처하던 세력이다. 벽파의 연원은 영조 대 중반 이후 반(反) 세자론을 견지했던 노론 남당(南黨)에 있다.

남당은 신임의리의 연원을 숙종 대 장희빈 토죄를 반대한 소론 영수 남구만(南九萬) · 류상운(柳尙運) 등으로 소급 적용하였고, 소론산림윤증(尹拯)의 배후까지 거듭 밝혀야 한다고 했던 윤지술(尹志述) · 이의연(李義淵) 등 노론 유생들의 현창(顯彰)까지 주장했다가 영조의 제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들은 신임의리를 사문 시비까지 확대하고 한양의 명문가뿐만 아니라 한미한 유생의 기여도 인정해야 한다는 철저한 준론(峻論)으로 학통상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 계열의 호론(湖論)과 가까웠다.

남당의 영수인 김상로는 노론 탕평파이지만, 대대로 벼슬살이 한한 경화 벌열로서 외척이 되거나 4대신을 배출한 노론 북당(北黨) · 동당(東黨)에 비하면 빈한한 상황에서 청론(淸論)을 주도한다고 자부한 남촌(南村) 지역 사족들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김상로는 탕평을 군자당과 소인당의 일진일퇴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처럼 강경한 의리론을 주장하였으며, 사도세자가 소론의 영향으로 신임의리에 소홀하다는 여론을 퍼뜨리고 이를 영조에게 고하는 등 반(反) 세자 세력의 중심이었다.

김상로는 후궁인 문녀(文女)와 결탁하고, 노론 북당의 홍계희 · 홍인한과 소론 정후겸를 끌어들여 세자 교체를 시도하여 임오화변에 이르게 한 주역이다. 임오화변 전후에는 김상로의 남당에 새 외척인 김귀주(金龜柱)도 가세하여 구 외척인 홍봉한의 북당과 대결 구도를 형성하였다.

벽파의 형성

임오화변 전후 남당은 공홍(攻洪) · 살홍론(殺洪論)으로 노론 청론을 주도하며 홍봉한에 맞섰으나, 김귀주는 현명한 척신이라는 이유로 존숭하였다. 세손은 김귀주를 배척하였지만 김종수 · 유언호 등 남당 청류와는 의리론에서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그래서 남당은 세손이 ‘영조의 임오의리’를 준수할 것이라고 신뢰하였다.

세손은 궁료인 홍국영(洪國榮) · 정민시(鄭民始)를 통해 김귀주- 정순왕후와 연결되어 있던 남당과 연합하여 홍봉한 대신 북당을 이끌던 홍인한(洪麟漢)의 세손 대리청정 저지 책동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남당 인사들은 홍국영과 더불어 정조의 즉위에 기여하였다고 자부하며, 정조 초 『 명의록』 의리의 방향을 설정하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80년(정조 4) 홍국영이 축출된 뒤에 정조가 소론 서명선을 의리 주인으로 높이고 노론 북당 · 동당이 그에게 협력하며 요직을 독점하자, 남당은 이들을 시류에 영합하는 시파(時派)라 비판하면서 궁벽한 처지에서도 노론의 의리를 지키는 벽파라 자칭하였다.

이들의 기준에서 서명선은 북당의 일원인 서명응의 동생인데 홍인한 탄핵을 위해 뒤늦게 궁료에게 발탁되어 탄핵소를 올린 소론일 뿐이고, 벽파는 『명의록』 의리는 물론 신임의리와 ‘영조의 임오의리’에 가장 철저한 세력이라고 자임했기 때문이다.

시파에게 견제를 받던 벽파는 1788년(정조 12) 이후 김치인(金致仁) · 유언호 · 김종수 등이 연이어 재상이 되어 정조의 사도세자 재평가와 임오의리 수정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 준론 및 남인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변천 및 현황

벽파는 정조와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재평가와 임오의리 변경 사업에 강력히 항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영조가 정한 대의리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견지해야 할 원칙론 차원의 반대였을 뿐 끝까지 정조의 새로운 의리 천명에 항거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벽파 역시 군주의 의리 주재를 궁극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신료일 뿐 아니라, 세손 시절 이래 의리론상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파의 영수 김종수가 사도세자 처분에 대한 영조의 후회를 드러낸 「금등(金縢)」 문서가 공개된 후 세자에 대한 존호 추상(追上)에 동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정조는 겉으로 강경한 모습을 보이지만 끝내는 수용했던 김종수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1795년(정조 19) 이후에 정조는 임오의리 변경에 호응한 노론 추시파(追時派)와 남인 및 소론 준론을 물리치고 벽파를 중용하는 환국을 단행하였다. 이는 벽파의 의리 변경 의지를 시험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호응하여 벽파의 영수 심환지(沈煥之)는 장헌세자의 전례(典禮) 문제, 곧 추왕(追王)도 담당할 수 있다는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

근래에 공개된 ‘ 정조- 심환지 어찰(御札)’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자료다. 벽파의 후원자인 정순왕후 역시 김한구 · 김귀주가 임오화변의 배후라는 세간의 무고함을 풀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정조의 임오의리 변경을 강렬히 반대하던 벽파의 호응은 ‘화평’의 정치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한 후 벽파는 기존의 태도를 전면 변경하였다. 벽파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맡은 정순왕후의 뜻에 따라 노론 추시파와 소론 준론 및 남인을 추왕 세력 혹은 사교(邪敎) 혐의로 처형하고 그 배후로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을 처형하였다. 또 정조가 이미 정해둔 국혼(國婚)까지 무산시켜 시파의 김조순(金祖淳)이 외척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장용영은 공노비 혁파의 비용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해체해 버렸다.

벽파는 정조가 구축한 탕평 정치의 원칙과 성과를 집권 1~2년 사이에 부정하였다. 이는 정조대에 조성된 정치 세력 사이의 신의를 뿌리부터 흔든 것이었다. 순조가 성년이 되어 친정(親政)에 나서자 벽파는 새 외척 김조순이 이끄는 시파뿐 아니라 노 · 소론 신료 전반에게 반격을 당하였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연장하려는 무리수를 두다가 시파에게 저지당한 뒤 사망하였다. 시파에 비해 사회적 기반이 빈약했던 벽파는 정순왕후의 후원을 잃자 노론 시파와 소론 연합 세력의 반격을 받아 급속히 몰락하였다.

의의 및 평가

영조대 중 · 후반 노론 남당을 연원으로 하는 벽파는 반(反) 세자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즉위에 기여하였기에 시파에 맞서 정조 대 탕평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한 임오의리 변경에 강렬히 반대하였지만 정조의 뜻에 호응하여 화평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순조대 초반 벽파 집권기에 보여준 사적 보복의 정치와 급속한 몰락은 벽파의 사회적 기반과 정치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원전

『명의록(明義錄)』
『순조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한중록(閑中錄)』

단행본

최성환, 『영 · 정조대 탕평정치와 군신의리』(신구문화사, 2020).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신구문화사, 2009).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지식산업사, 1997).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