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남당은 신라와 백제의 정청(政廳)이다. 마을의 원시적인 집회소에서 기원하였는데, 연맹왕국에서는 그 성격이 바뀌었다. 임금과 신하들의 좌석을 구별하여 왕궐(王?)과 신궐(臣?)이 있었다. 왕이 주석(主席)으로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밑에 신하들이 서열에 따라 정렬하였다. 점차 국가의 정무가 복잡해지고 실무와 행정기능이 분리되면서 군신회의·회견·의식을 행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신라에서는 화백회의가 개최되는 장소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도병마사와 조선시대의 비변사와 같은 합좌기관으로 변형, 발전하였다.
정의
신라와 백제의 정청(政廳).
개설
내용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249년(점해왕 3)에 남당을 궁궐 남쪽에 지었으며, 251년부터 이곳에서 정사를 집행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성립된 것은 신라가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때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편, 백제에서는 261년(고이왕 28)에 왕이 이곳에 정좌해 정사를 들었다고 했는데, 당시 백제는 연맹왕국을 이룩했을 때이므로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당에는 왕궐(王橛)과 신궐(臣橛)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들의 좌석을 구별하는 좌석표인 궐표(橛標)가 있어 군신의 석차가 구별되었다. 왕은 문자 그대로 주석(主席)으로서 제일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그 밑에 신하들이 관계(官階) · 지위의 순서에 따라 정렬하였다. 내물마립간 때부터 시작되는 왕호로서의 마립간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즉, 마립간의 마립은 마루〔大廳〕로 궐(橛)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마립간은 바로 그 우두머리(干 · 可汗)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변천
한편 남당의 건물 형태는 동서 방향의 남청(南廳)과 북청(北廳) 건물이 대칭으로 존재하고, 그 가운데 넓은 마당이 있으며, 마당의 동쪽이나 서쪽에 국왕이 정좌(定座)할 수 있는 전각(殿閣)과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대문(大門)이 있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신라통일기에 등장하는 평의전(平議殿)은 바로 남당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남당의 유풍은 고려시대의 도병마사(都兵馬使), 혹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조선시대의 비변사(備邊司)와 같은 합좌기관으로 변형,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신라 왕궁(新羅 王宮)의 배치양상(配置樣相)과 그 변화(變化)」(전덕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27, 2006)
- 「신라 화백회의(新羅 和白會議)의 성격과 그 변화」(전덕재, 『역사학보(歷史學報)』182, 2004)
- 「고대남당고(古代南堂考)」(이병도, 『서울대학교논문집 1-인문사회과학(人文社會科學)-』, 1954;『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博英社), 1976)
- 「麻立干の原義をたずねて」(三品彰英, 朝鮮學報 1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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