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는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이다. 처음에는 빈번한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했다. 하지만 의정부와 병조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등 그 기능이 강화되면서 독립된 상설 협의기관으로 발전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모했다. 의정부와 육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행정체계의 문란, 왕권의 상대적 약화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폐지되었다.
비국(備局) · 묘당(廟堂) · 주사(籌司)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정치체제는 왕권과 의정부 · 육조(六曹) · 삼사(三司 :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의 유기적인 기능이 표방되는 체제였다. 의정부가 정책조정 기관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 육조가 행정 실무를 집행하고, 삼사(三司)가 권력 행사에 견제 작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군사 업무는 원칙적으로 의정부와 병조 사이에서 처리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에 이르러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보다 실정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점차 의정부의 3의정(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을 포함하는 원상(院相 : 임금이 정상적인 정치를 할 수 없을 때 이를 대리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던 원로 재상)과 병조 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 방략을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지변사재상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방략 수립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활동면에서도 부침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국방력의 약화, 군사전문가의 부족, 군제의 해이 등 대내적 요인과, 간헐적으로 계속된 외적의 침입이라는 대외적 요인 때문에 그 필요성이 계속 인정되고 있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지변사재상을 급히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하는 한편, 그동안 변칙적이며 편의적으로 유지해오던 지변사재상과의 합의체제를 고쳐 임시적으로 비변사라는 비상 시국에 대비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그 뒤 1517년에는 여진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사(築城司)를 설치, 이를 곧 비변사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520년에 폐사군(廢四郡) 지방에 여진이 칩입하자 다시 비변사를 설치하는 등 주로 외침을 당해 정토군(征討軍)을 편성할 때 비변사가 임시로 설치되었다.
비변사는 1522년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의 방어 대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기능이 강화될 기회를 맞게 되었다. 즉 변방 군사 문제의 처리에서 의정부와 병조를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왕에게 보고하게 되어 이들을 압도할 소지를 마련, 그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가 팽배하였다.
그러나 기능상에 다소의 신축이 있었을 뿐, 거의 상설기관화하여 변사(邊事)의 주획(籌畫)에 중요한 구실을 수행해왔다. 그러면서도 비변사는 관제상의 정식 관청은 되지 못했는데, 1554년(명종 9) 후반부터 잦아진 변경(邊警)이 이듬해 을묘왜변으로 이어지면서 독립된 합의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즉, 1554년부터 비변사 당상관들은 종래처럼 빈청(賓廳)에 모이지 않고 비변사에 모여 변방의 군사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관청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을묘왜변이 일어나 그 활동이 잦아지는 것과 함께 권한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맞아 청사도 따로 마련하고 관제상의 정식아문(正式衙門)이 되었다.
1555년 관제상의 상설 관아로 정제화된 비변사는 변방의 군사 문제를 주획하는 관청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또, 그 권한도 비록 정1품 아문이었지만 의정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난을 수습, 타개하기 위해 비변사를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 기관으로 활용하면서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었다.
즉,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청병(請兵), 둔전(屯田), 공물 진상, 시체 매장, 군량 운반, 훈련도감의 설치, 산천 제사, 정절(貞節)의 표창 등 군정 · 민정 · 외교 · 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기능이 확대, 강화된 비변사는 효종 때 비변사의 폐지를 주장한 대사성 김익희(金益熙)가 지적했듯이, 군사 문제를 협의하는 관청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비빈(妃嬪)의 간택까지도 처리하는 등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확대, 강화된 비변사는 임진왜란 후 그 권한을 축소하고, 정부 각 기관의 기능을 환원시키자는 주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복구와 국방력 재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대로 존속되었다.
인조 때에 이르러 서인정권은 후금(後金)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군사 · 정치의 양권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군영(軍營)들을 설치하는 한편, 비변사의 제조당상(提調堂上)을 겸임하는 등 비변사를 통해 정부의 전 기구를 지배하였다. 이제 비변사는 임시군사 대책기관으로부터 정책결정 기구로 그 성격이 변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더욱 확대되고, 권한도 강화되어 의정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뒤 효종과 현종 때에도 비변사의 정치적 지위는 동요하지 않았고, 주요 정책의 일부는 대신들만의 수의(收議)를 통해 결정되는 방식이 새롭게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명칭만 바꾸자는 소극적인 건의만 있었을 뿐, 숙종과 영조 때에는 오히려 인원과 관장 업무가 더 확장되었으며, 정조 때에도 권한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이와 같은 비변사 기능의 확대, 강화는 의정부와 육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행정체제를 문란하게 할 뿐, 국방력의 강화와 사회 혼란의 타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왕권의 상대적 약화를 가져왔다고 인식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지향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우선 1864년(고종 1) 국가 기구의 재정비를 단행, 의정부와 비변사의 사무 한계를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종전대로 외교 · 국방 · 치안 관계만을 관장하고, 나머지 사무는 모두 의정부에 넘기도록 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격하시켰다. 또, 이듬해에는 비변사를 폐지하여 그 담당 업무를 의정부에 이관하고, 그 대신 국초의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비변사는 중종 때부터 도제조(都提調) · 제조(提調) · 낭관(郎官) 등의 관원으로 조직되었다. 도제조는 현직의 3의정이 겸임하기도 하고, 한성부판윤 · 공조판서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혹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등이 겸임하는 등 때에 따라 달랐다. 임진왜란 때 비변사 관원은 도제조 · 부제조 · 낭청(郎廳) 등으로 조직되었다.
도제조는 현직 및 전직 의정이 겸임했으며, 제조는 2품 이상의 지변사재상뿐만 아니라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의 판서와 강화유수가 겸임하였다. 이후 훈련도감이 창설되자 훈련대장도 예겸(例兼)하게 되었다. 부제조는 정3품으로 군사에 밝은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부제조 이상은 모두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으로, 이들을 총칭해서 비변사당상이라고 불렀으며 정원은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군사에 정통한 4인을 뽑아 유사당상(有司堂上), 즉 상임위원에 임명하여 항상 비변사에 나와서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낭청은 실무를 맡아보는 당하관으로서 정원은 12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1인은 무비사낭청(武備司郎廳)이 예겸하고, 3인은 문신, 8인은 무신당하관 가운데에서 선임하였다. 이 밖에 잡무를 맡아보는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1인과 잡역을 담당하는 수직군사(守直軍士) · 사령(使令) 등 26인이 있었다.
그 뒤 인조 때에는 대제학, 숙종 때에는 형조판서 · 개성유수 · 어영대장이 제조를 예겸하도록 추가되는 등 때에 따라 인원수의 변동이 있었다. 또한, 1713년(숙종 39)에는 팔도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두어 8도의 군무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는데, 대개 각 도에 1인의 구관당상을 두고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맡아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