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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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조선시대 국가의 정무(政務)를 나누어 맡아보던 여섯 조(曹)에 대한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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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 조선시대 국가의 정무(政務)를 나누어 맡아보던 여섯 조(曹)에 대한 총칭.
내용

육조(六曹)는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를 일컫는다. 육부(六部) 또는 육관(六官)으로도 불린다. 육부는 982년(성종 1) 중국식 관제를 본떠 설치한 육관, 즉 선관(選官) · 민관(民官) · 병부(兵部) · 의형대(義刑臺) · 예관(禮官) · 공관(工官)을 말하는데, 995년(성종 14)에 상서육부(尙書六部)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근대적인 관제로 개편되는 1894년(고종 31)까지 사사(四司) · 육조(六曹) · 삼부(三部) · 육부(六部) · 육사(六司) 등으로 변천, 계승되었다. 육조의 변천은 〈표〉와 같다.

시대\육조 고려 조선
995 1275 1298 1308 1356 1362 1369 1372 1389 1392 1894
(성종 14) (충렬왕 1) (충렬왕 24) (충렬왕 34) (공민왕 5) (공민왕 11) (공민왕 18) (공민왕 21) (공양왕 1) (태조 1) (고종 31)
이조 상서이부(尙書吏部) 전리사(典理司) 전조(銓曹) 선부(選部) 이부(吏部) 전리사(典理司) 선부(選部) 전리사(典理司) 이조(吏曹) 이조 내무아문(內務衙門)
호조 상서호부(尙書戶部) 판도사(版圖司) 민조(民曹) 민부(民部) 호부(戶部) 판도사(版圖司) 민부 판도사 호조(戶曹) 호조 탁지아문(度支衙門)
예조 상서예부(尙書禮部) 전리사(典理司) 의조(儀曹) 선부(選部) 예부(禮部) 예의사(禮儀司) 예부 예의사 예조(禮曹) 예조 학무(學務) 외무아문(外務衙門)
병조 상서병부(尙書兵部) 전부사(軍簿司) 병조(兵曹) 선부(選部)→총부(摠部)→군부사(軍簿司) 병부(兵部) 군부사(軍簿司) 총부(摠部) 군부사 병조(兵曹) 병조 군무아문(軍務衙門)
형조 상서형부(尙書刑部) 전법사(典法司) 형조(刑曹) 미부(嵋部)→전법사(典法司) 형부(刑部) 전법사 이부(理部) 전법사 형조(刑曹) 형조 법무아문(法務衙門)
공조 상서공부(尙書工部) 폐지 공조(工曹) 폐지 공부(工部) 전공사(典工司) 공부 전공사 공조(工曹) 공조 농상(農桑) 공무아문(公務衙門)
〈표〉 육조의 변천

육조는 1274년(고려 원종 15)까지는 각 조에 상서(尙書) 1인, 지부사(知部事) 1인, 시랑(侍郎) 1인, 낭중(郎中) 1인, 원외랑(員外郎) 1인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근대적인 관제로 개편되는 1894년까지 국내외 정세 변화 및 육조 기능의 강화 등에 따라 십수 차례 변천, 계승되었다.

육조의 법제적인 기능은 고려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 『경국대전』 이후의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의하면, 육조는 국왕에게 직접 정무를 보고하고 이에 대한 지시를 받으면서 국정을 나누어 맡도록 규정되었다. 즉 이조는 문선(文選) · 훈봉(勳封) · 고과(考課), 호조는 호구(戶口) · 공직(貢職) · 전량(田糧) · 식화(食貨)를 맡았다. 예조는 예악(禮樂) · 제사(祭祀) · 연향(宴享) · 조빙(朝聘) · 학교(學校) · 과거(科擧)를 맡았다. 병조는 무선(武選) · 군무(軍務) · 의위(儀衛) · 우역(郵驛) · 병갑(兵甲) · 기장(器仗) · 문호(門戶) · 관약(管貿)을 맡았다. 형조는 법률(法律) · 상언(詳嵋) · 사송(詞訟) · 노예(奴隷), 공조는 산택(山澤) · 공장(工匠) · 영선(營繕) · 도야(陶冶)에 관한 정사를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권의 강약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의정부(議政府) · 원상(院相) · 비변사(備邊司) · 규장각(奎章閣) 등의 대두와 연관되면서 기능이 강해지거나 약해졌다.

육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고려시대의 육부는 995(성종 14)∼1170년(의종 24)에 중서문하성과 중추원(中樞院)의 2품관 이상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치가 운영되면서,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이 대체로 반열의 차례에 따라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의 판사(判事)를 겸임하여 해당 부(部)를 실질적으로 지휘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1171(명종 1)∼1270년(원종 11)에는 무신 집정과 직결된 중방 · 도방 · 교정도감 · 정방 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육부는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1279(충렬왕 5)∼1399년(정종 1)에는 권문세족이나 개국 공신 등 수십 명의 재추(宰樞)가 도평의사사를 통해 정치 · 군사 · 경제 · 문화 등 내외의 모든 일들을 합의하고 집행했으므로 육부는 미약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는 도평의사사가 육부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한 육색장(六色掌)을 운영하고, 1389년(공양왕 1)경에 육색장을 이 · 병 · 호 · 형 · 예 · 공방녹사(工房錄事)로 개칭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육방 속사의 사무를 통할하는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였다. 1392년에 각 사의 수품공사(受稟公事: 품의를 받은 공적인 업무)를 육조를 통하지 않고 도평의사사로 직접 보고하게 하는 등 도평의사사가 국사를 나눠 맡았기 때문에 육조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0년(정종 2)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대신들의 세력을 크게 억제했지만, 육조는 아직도 의정부의 지휘를 받아 국사를 처리했기 때문에 미약하였다. 1405년(태종 5)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 중심의 국정 운영을 꾀하고 육조를 3품아문(三品衙門)에서 2품아문으로 승격시켰다. 또 육조가 직접 조정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 삼사(三司) · 승추부(承樞府)가 관장한 문무반의 인사 · 재정 · 군정을 이조 · 호조 · 병조로 귀속시키는 등의 조처를 통하여 육조 중심의 국정 체제, 즉 육전체제(六典體制)를 체계화하였다.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의 교체는 반복되었다. 의정부서사제는 1414년(태종 14)년 육조직계제로 바뀌었다. 이후 1436년(세종 18) 의정부서사제를 회복하였다. 세조 원년인 1455년 육조직계제를 다시 시행하였다. 성종 때 의정부서사제를 다시 시행할 것을 두고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하지 않았다. 1516년(중종 11)에 다시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였다.

1400년(정종 2)~1414년(태종 14), 1436(세종 18)∼1455년(세조 1) 및 1516(중종 11)∼1555년(명종 10)에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운영되면서 육조는 의정부의 지휘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육조가 독자적으로 국정을 처리한 것은 1414∼1516년으로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가 운영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1467(세조 13)∼1476년(성종 7)에는 원상을 중심으로 한 국정 운영으로 위축을 면하지 못하였다. 1555∼1865년(고종 2)에는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국정이 운영되어 육조도 이의 지휘를 받았다. 특히 1776(정조 즉위년)∼1779년에는 규장각의 대두로 육조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801(순조 1)∼1863년(철종 14)에는 안동김씨 ·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정치로 정상적인 운영이 저해되었다. 1865년(고종 2)에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기능을 부활시키면서 육조는 의정부의 지휘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도록 되었으나 1873년(고종 10)까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그 이후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중심으로 한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독주로 정상적인 기능을 억제당하였다.

육조의 사무 운영에서 상례사(尙例事)는 19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주관하는 정랑 · 좌랑이, 중대사 · 돌발사는 판서 · 참판 · 참의 등 당상관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였다. 육조의 서열은 의례적으로는 1418년(태종 18)까지 이조 · 병조 · 호조 · 예조 · 형조 · 공조의 순서였다. 그 이후는 주관(周官)의 순서에 복귀하면서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순서로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려 · 조선 전 시기에 이조 · 병조 · 호조 · 예조 · 형조 · 공조의 순서를 유지하였다.

육조의 실제 기능은 왕권 및 통치구조 등과 밀접히 연관되어 수시로 강약이 교체되었지만 법제적으로는 국정을 나눠 맡는 가장 중심이 되는 국정기관이었다, 따라서 육조의 정랑 · 좌랑은 임기를 마치면 승진되는 특혜를 받았으며, 특히 이조 · 예조 · 병조의 정랑 · 좌랑은 문관만이 제수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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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육조연구: 제도의 확립과 실제기능을 중심으로」(한충희, 『대구사학』 20; 21, 1981)
「조선초기의정부연구」(한충희, 『한국사연구』31; 32, 1980·1981)
「원상제의 성립과 기능」(김갑주, 『동국사학』12, 1973)
「조선비변사고」(이재호, 『역사학보』50; 51, 1971)
「고려시대 중앙정치기구의 행정체계: 상서성기구를 중심으로」(변태섭, 『역사학보』47, 1970)
「규장각고」(김용덕, 『박제가연구』, 1970)
「고려도당고」(변태섭, 『역사교육』11; 12, 1969)
「여말선초의 상서사」(김윤곤, 『역사학보』25, 1964)
「고려무인정치기구고」(김상기, 『동방문화교류사논고』, 1948)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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