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우리 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의 해적이다. 일본 정국의 불안정으로 남부 지방 일부 세력이 해적화하고, 동아시아의 정세혼란으로 왜구퇴치에 역량을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왜구의 약탈은 구조적으로 고착되어 갔다. 한반도의 해안지대만이 아니라 내륙에까지 침범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그 피해가 막대해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지속적인 왜구소탕 작업, 고려와 조선의 쓰시마 정벌에도 불구하고 왜구 침입은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되었다.
왜구(倭寇)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적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하였으며 그 피해도 적지 않았다. 왜구는 ‘왜가 도둑질한다’는 뜻이지만, 고려말 이래 그들의 약탈 행위가 잦아지면서 왜인들의 해적 행위를 표현하는 명사가 되었다. 왜구는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九州〕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쓰시마〔對馬〕 · 마쓰우라〔松浦〕 · 이키〔壹岐〕등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 중에는 왜구가 일본인과 고려인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4세기 중엽 이후 왜구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이 쇠퇴하게 되자, 원의 일본침입 이후 전제화되어 있던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세력들이 해적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하였다.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이 국내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국외로 공격성을 띠게 된 것이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본에서 해적이 크게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1367년에 한족왕조인 명이 건국하였으나, 북원과의 패권 경쟁으로 왜구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고려는 원간섭기에 원의 간섭과 감시로 자체의 군사력을 갖추기가 어려워 국방이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약화된 군사력을 일거에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원과 중국대륙의 신흥국인 명과의 외교관계 긴장으로 왜구 침입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고려 때의 기록에서 왜구는 두 시기에 발생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첫 번째 침입이다. 이때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수행하던 기간이었다.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기 전인 1265년까지 왜구는 11회 고려를 침입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13세기 왜구’라고도 한다. 몽골의 2회에 걸친 일본 침공 이후 14세기 중엽까지 80여년 동안 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충정왕 2)부터였다. 이를 ‘후기 왜구’라고도 부르는데, 동해 · 서해 · 남해의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범하였다. 수도인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에까지 출몰해 개경의 치안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며, 고려는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 침입해온 왜구의 규모, 빈도, 침입한 지역과 침입하는 양식 등에 있어서 ‘13세기 왜구’와 차이가 크다. 또한 고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지방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침략하여 명대를 통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왜구는 1370년대∼1380년대의 10여년 간 가장 치열하게 발생하였다.
1223년 첫 침략 이래 해마다 왜구가 이어지자 고려는 1227년(고종 14) 박인(朴寅)을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 금지를 요구하였다. 이때의 왜구는 여몽연합군의 2차례의 일본 공격 이후 사라졌다. 1350년 이후 ‘후기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여 피해가 심해지자, 1366년(공민왕 15) 검교중랑장(檢校中郎將) 김일(金逸)을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의 쇼군〔將軍〕에게 보내어 왜구 금지를 요구하였고, 이를 근절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1375년(우왕 1)에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1377년에는 전 대사성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였다. 정몽주는 규슈단타이〔九州探題〕 · 이마카와 료순〔今川了俊〕의 협조를 받아 잡혀갔던 고려인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한편, 왜구 소탕전을 보면 1376년 최영(崔瑩)이 홍산(鴻山: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에서 대승을 거둔 홍산대첩, 1380년 왜선 5백여 척이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나세(羅世) · 최무선(崔茂宣) 등이 화포로 모두 불살랐던 진포대첩, 이 때 상륙한 왜구가 내륙 각지를 노략하고 황산(荒山)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를 물리친 황산대첩, 1383년(우왕 9) 정지(鄭地)의 남해대첩(南海大捷)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이 컸던 인물은 최무선이었다. 그는 화약 · 화포 · 화전(火箭) 등의 화기를 만들어 진포대첩과 남해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밖에도 성을 쌓고 방어 초소를 더 설치했으며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양반 · 백성 · 재인(才人) · 화척(禾尺) 등으로 군인을 삼고, 공 · 사노(公私奴)로 연호군(煙戶軍)을 삼아 왜구에 대비하였다. 한편, 회유책을 써서 경상도 · 전라도에 왜인만호부(倭人萬戶府)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때 투화(投化)한 왜인들을 국내에 거주하게 하여 일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본래 거주하던 일본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군사력을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특히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1377년에는 전함들을 만들고, 1380년에는 최영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 임명해 적극 대처하였다. 또, 해변의 인민을 모집해 3정(丁)을 1호(戶)로 삼아 수군을 편성하고, 연해의 토지는 조세를 면제해 수군의 처와 자식을 부양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
왜구는 일본에서 유래한 해적이 일방적으로 고려와 명을 침략한 것이지만, 고려(조선)와 명 사이에 심각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명은 고려에게 왜구를 엄금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혹시라도 고려(조선)이 일본과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군사적 위협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명의 의심과 협박을 잠재우기 위해 왜구를 정벌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주변국인 고려(조선)와 명의 의심을 잠재우고, 남북조의 혼란기에 일본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을 필요성에서 왜구 문제가 해결될 필요성이 있었다. 고려말인 1389년(창왕 1)과 조선초인 1418년(세종 즉위년)에 단행된 쓰시마 정벌은 동아시아 3국의 이해가 맞아 이루어진 군사적 행동이었다. 왜구를 토벌하는데 고려에 협조한 측은 북조인 막부-쇼군측이었는데, 이들은 왜구 토벌에 협조함으로써 국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국왕’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으며 남조에 대하여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고려말의 첫 쓰시마 정벌은 1389년 2월에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인 박위(朴葳)를 파견하여 병선 1백여 척을 이끌고 공격한 것이다. 이때 적선 3백여 척을 불사르고 잡혀갔던 고려인 1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첫번째 정벌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고려는 이 정벌로 왜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왜구는 고려 말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어 1393년(태조 2)부터 1397년까지 53회나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근심이 왜구 만한 것이 없다(國家所患莫甚於倭)”라고 할 정도로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구를 금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고, 조선 쪽으로 귀화해오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평화적인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소탕과 변경의 방어를 엄중히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조선 초에는 평화적 사절의 왕래와 향화왜인들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부족한 물자를 교역하기 위해 오는 자들을 특별히 흥리왜인(興利倭人: 商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태종 때에는 부산포(富山浦) · 내이포(乃而浦: 薺浦) · 염포(鹽浦) · 가배량(加背梁)의 4포를 개항해 이들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조선초에도 왜구가 계속되자 토벌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1396년 왜구가 120척으로 경상도 동래 · 기장 등지에 침입하자, 김사형(金士衡) 등을 시켜 쓰시마와 이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쓰시마에서는 매년 사절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미두를 받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왜구가 계속되자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다시 쓰시마를 정벌하고, 규슈 등 일본의 다른 지방과는 계속 통교하였다.
또한 조선도 대마도를 영구히 점령할 의사가 없었고, 이들의 왕래를 엄금하면 왜구가 재발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다시 통교를 허락하였다. 세종은 삼포(三浦: 富山浦 · 乃而浦 · 鹽浦)를 개항하고 여기에 왜관을 설치하여 일정한 규모의 무역을 허용하는 회유책을 병용하였다. 그 뒤에도 삼포왜란을 비롯해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 달량왜변(達梁倭變) 등이 있었으나, 조선의 회유정책은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의 왜구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 리의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피해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의 약탈은 국가 재정을 파탄의 지경에까지 몰고 갔다. 이에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