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이르러 기존의 정규군만으로는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임시로 지방의 농민을 징발하여 왜적에 대비하였던 군사조직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元帥)들의 임의적인 차출과 사역으로 농민들을 실농(失農)시키는 결과만 초래하여, 결국 1376년(우왕 2) 이를 파하고 농민군을 귀농시켰다.
그 뒤 왜구의 침입이 더욱 극렬해지자 1378년 12월 변경에만 있던 익군(翼軍)의 편제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때 보통 군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구성된 연호군을 새로 조직하였다.
즉, 인리(人吏)·역자(驛子)와 관시(官寺)·창고(倉庫)·궁사(宮司)의 노비와 사노로 구성된 일종의 노예군으로 연호군을 삼아, 화살·화살촉·창검 가운데 한가지씩을 갖추어 5명이 한 조가 되고 소속관이 지휘하여 싸움을 익히게 하였다.
이처럼 연호군은 익군과 함께 편성되었으나, 개경의 오부방리군(五部坊里軍)이나 각도의 원정별초(原定別抄)와는 그 징발대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오부방리군이나 원정별초가 가옥의 칸수나 인정(人丁)의 과다로 징발된 것에 비해, 연호군은 세대(世帶)를 기준으로 징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 세대에서 한명의 남정(男丁)이 징발되었다는 점에서 연호군이라 한 듯하며, 대개의 경우 노비가 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으나, 이 때는 대개 국가의 큰 공사를 위하여 동원되는 민호군(民戶軍)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