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조선에서는 임신약조를 맺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왔다.
그러던 중 1544년 4월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萬戶) 유택(柳澤)과 접전하여 수군(水軍) 1인을 죽이고 10여인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삼포왜란과는 아주 다르지만 대일본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였다.
이 무렵의 일본은 군웅할거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때문에 국내가 혼란하자 왜구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왜변으로 인해 일본과의 통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찬반양론으로 맞섰고 절왜론(絶倭論)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할 경우 왜구가 다시 일어날까 염려되어 국왕사(國王使) 및 우리 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오우치(大內)·쇼오니(小二) 등에는 통교를 허락하였다. 단, 대마도(對馬島)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통교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대마도주가 왜구의 움직임을 알면서도 방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국왕사에 대해서는 ‘영봉선(迎逢船 : 국왕사의 배가 돌아갈 때 마주오는 배)’이란 무역 제도를 허용하였다.
또, 이 왜변을 계기로 병조의 건의에 의해 가덕도(加德島)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간절한 요청과 중종의 거상(居喪)도 끝났기 때문에,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체결하고 통교를 허락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세견선(歲遣船)을 25척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풍랑불순을 이유로 가덕도 서쪽에 내선(來船)하는 일본인은 왜적으로 논하기로 하고, 약속은 모두 조선 진장(鎭將)의 명에 따르게 하여 위약 때는 벌칙을 두어 출입 규제를 강화한 것이다. 이 조약으로 통교는 재개되었으나 전과 같이 평화로운 관계는 유지되지 못하였다. 일본 자체의 혼란으로 다시 왜구의 침입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정미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