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중순당(中順堂).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했으나, 여러 번 과거에 떨어진 뒤 향리에서 학교를 열고 후진을 기르는데 힘썼다.
공민왕 때 중랑장으로 영전도감판관(影殿都監判官)이 되어 공사감독을 잘해 예의총랑(禮儀摠郎)이 되었다. 또한 왕명으로 목반룡(木蟠龍)을 만들어 전문(殿門) 장식을 감독하여 그 기교가 뛰어나 칭찬을 받았고, 이어 사재령을 거쳐 사농소경(司農少卿)에 올랐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도를 만들고 여러 왕조의 흥망과 국토의 변천, 연혁을 서술하여 바쳤다. 특히, 고사에 밝아 왕의 측근에서 이야기를 잘해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374년(공민왕 23)에 사헌부로부터 영전감독시 재목을 횡령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375년(우왕 1)에 다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어 일본과 화친할 것을 진언하고 통신사를 자청하여 일본에 가서 왜구의 출몰을 금지할 것을 직접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과는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정벌 이후 100여 년간 국교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간첩으로 의심받아 구속되었다.
마침 중 양유(良柔)의 주선으로 석방되고 고려와는 다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 때 나흥유의 나이는 60이었으나 150이라고 속이니, 왜인이 모여들어 구경하며 상을 그리기도 하고 찬(讚)을 지어주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1376년 일본의 사신으로 파견된 양유와 함께 돌아왔다. 저서로는 『중순당집(中順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