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는데, 대마도는 그들의 근거지였다. 이에 고려, 조선 정부는 1389년(창왕 1),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특히 세 번째 정벌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졌다. 정벌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일본 측 세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왜구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 집단을 총칭한다. 그중에서도 1350년(충정왕 2) 이후 고려 말까지 약 40년 동안 왜구에 의한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다. 특히 우왕 재위 기간(1374~1388)에는 총 378회, 연평균 27회에 달할 정도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으며, 남해 연안뿐만 아니라 수도 개성을 위협하거나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등 전국이 왜구에 시달렸다. 왜구는 단순한 약탈뿐만 아니라 살인과 납치, 방화 등을 마구 저질렀다.
고려 정부는 한편으로는 육지 곳곳에 성을 쌓고 수군을 증강하며 화기를 개발하는 등 왜구 방어에 임하며, 한편으로는 일본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서 왜구를 통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구주(九州) 일대는 중앙에 밀린 남조(南朝) 세력의 본거지였으며, 그중에서도 막부(幕府)의 통제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던 삼도(三島), 즉 대마도 · 일기(壹岐, 잇끼) · 송포(松浦, 마쓰우라: 현재의 나가사키) 세 곳이 왜구의 본거지로 지목된다.
본래 대마도는 땅이 매우 척박해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일본 원정 이후 고려와의 교역이 줄어든 데다가 국내 정세마저 불안정해지자 대마도는 식량 확보를 위해 해적 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또한 남조 세력이 부족한 군량미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직적으로 남조 휘하의 세력을 한반도에 침범시킨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려와 조선 정부는 고려 1389년(창왕 1),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첫 번째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1387년(우왕 13)에는 앞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몇 차례 공을 세운 정지(鄭地)가 대마도를 정벌하자고 건의한 일도 있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벌을 결행할 때까지 꾸준히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1388년(우왕 14)에 요동 정벌을 위해 고려군이 북상하자 남방의 방비가 소홀해졌다. 이 틈을 타고 왜구는 다시 양광도(楊廣道) 일대를 침범하였다.
이듬해인 1389년 2월, 첫 번째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었다. 정벌을 이끌었던 박위는 주로 경상도에서 활동하며 왜구와 대적하고 있었으며,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하여 회군 공신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박위는 원수(元帥) 김종연(金宗衍) · 최칠석(崔七夕) · 박자안(朴子安) 등과 함께 정벌에 나섰다. 이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와 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00척이었던 것으로 보아, 수천 명 정도의 군대가 출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은 대마도에 도착해 왜선 300척과 해안의 건물들을 모두 불태웠으며, 또 포로로 잡혀갔던 고려인 100여 명을 데리고 귀환했다고 한다.
이때의 정벌에 대해서는 기록이 너무 간략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왜구와 교전하였다는 언급은 보이지 않으며, 당시 사람들이 “건물과 배를 불태웠을 뿐 포로를 잡아오지는 못했다.”라고 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다만 왜구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한 이때의 정벌로 왜구의 기세가 크게 꺾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은 1396년(태조 5)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루어졌다. 1389년의 출정 이후 왜구의 기세는 한풀 꺾였으나, 조선 개국 이후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393년(태조 2)부터 1397년(태조 6)까지 총 53회나 조선 연해안을 침범하였던 것이다. 특히 1396년에는 8월에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하여 동래(東萊) · 기장(機張) · 동평성(東平城)을 함락하고, 11월에도 5회나 침입하는 등, 한 해에 13회나 침입하였다.
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都兵馬使),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은 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김사형이 이끈 군대는 이듬해 1월 30일에 서울로 귀환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김사형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고,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 번째이자 가장 큰 규모의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 1)의 일로,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응영(應永)의 외구(外寇)라고 부른다.
1398년(태조 7) 1월,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후 대마도의 사절은 거의 매년 조선 조정에 와서 예물을 바치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 갔다. 이들 사절은 도주(島主) 종정무(宗貞茂, 소 사다시게)와 그 아들 및 섬의 각 세력가들이 보낸 자들이었다. 아울러 조선을 방문하는 상인들도 급증해 항구에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였는데, 이에 따라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그것도 통항 증명서인 행장(行狀)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 지역에는 많은 왜인이 거주하였고, 그들 가운데에는 풍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의 허실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1418년(태종 18) 3월 경상도의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에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왜인을 거주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태종 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60여 차례나 침입이 있었다. 그때마다 대마도주 종정무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왜의 상선을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1418년(태종 18)에 종정무가 죽자 그의 아들 종정성(宗貞盛, 소 사다모리)이 도주의 직을 이었다. 그러나 도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붕괴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 대마도에 기근이 들어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왜구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정벌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탈한 사건이었다. 이 싸움에서 조선 측은 병선 7척을 잃었고, 아군의 태반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때는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군무(軍務)만큼은 직접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대마도 정벌 역시 태종이 주도하여 결행한 것이었다.
1419년 5월 14일, 태종은 대신 회의를 열고 이종무(李從茂)를 3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고, 유습(柳濕)과 이지실(李之實)을 각각 좌군과 우군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아 경상 · 전라 · 충청의 3도 병선 200척과 수군을 거느리고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에는 각 도의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을 대대적으로 단속하여 이들이 적과 내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준비를 마친 6월 19일, 이종무는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 7,285명으로, 모두 65일치 식량을 준비하였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周原防浦: 현재의 경상남도 통영)를 출발하였다. 이튿날인 6월 20일, 선발대가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에게 글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대답이 없자 상륙,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선박 129척을 노획하고 1,939호의 가옥을 불태우며,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포로로 잡혀있던 중국인 131명을 찾아내는 등의 대승을 거두었다.
기습을 당한 왜군은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들었다. 이에 조선군은 6월 말까지 섬에 머무르며 적을 색출하는 한편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박실(朴實)이 이끈 좌군이 6월 29일에 적의 복병을 만나 백수십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때 대마도주는 조선군이 오래 머무를까 우려하여 철군할 것을 권유하였다. 마침 태종 역시 오래 머물지 말라고 명을 내리자 조선군은 신속하게 철수하였다. 이종무가 이끈 출정군이 거제도로 귀환한 것은 7월 3일의 일이었다. 7월 7일, 태종은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로 삼는 등 출정군을 이끈 장수들을 포상하고 전사자의 가족들을 위무하였다.
정벌 당시 대마도 왜구의 주력은 명나라 요동 일대로 약탈을 하러 나간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이 왜구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한 것은 아니었다. 철군 직후 왜구가 다시 출몰하자 조정에서는 재정벌 논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7월 12일에는 요동에서 명군이 왜구를 대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태종은 재정벌 의사를 거두어들였다.
7월 17일, 조선 조정은 대마도 측에 항복을 요구하는 서계(書契)를 발송하였다. 이후 한동안 항복 조건과 전후 처리에 관한 교섭을 거친 후 1420년(세종 2) 1월에 최종적으로 양측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첫째,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屬州)로 경상도 관할 하에 놓이며 경상도관찰사를 통해 조선 조정에 서계를 올릴 것, 둘째 대마도에서 요청한 인신(印信)을 하사할 것, 셋째 대마도에서 보내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참할 것. 즉 조선 정부는 대마도 측의 경제적 요구를 어느 정도 해결해 주는 선에서 그들을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왜구는 일본 측의 정세 불안과 경제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 · 조선 측의 외교적 교섭만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 세 차례에 걸친 직접적인 무력 동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419년의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더 이상 대규모의 왜구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대마도는 일본 측에서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조선 초기의 조선과 일본 사이 통교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를 이루며, 이후 양측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가는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