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는 코뿔소나 물소의 서각 띠돈을 사용하여 만든 조선시대 1품용 대(帶)이다. 공복을 제외한 관복에 사용하였다. 본래 서대는 명나라 2품이 사용하는 띠이므로 조선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띠였으나, 1485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국속(國俗)의 1품용 서대를 국가의 제도로 수용하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사용하였다. 바탕 띠인 정(鞓)에 삼태 3개, 남두육성 6개, 좌보·우필 각 1개, 타미 2개, 뒤쪽의 북두칠성 7개 등 20개를 사용하였다. 특히 중국 복주(福州)에서 생산되는 통천서(通天犀)를 좋은 서각으로 여겼다.
서대(犀帶)는 서각 띠돈을 사용하여 만든 조선시대 1품용 대(帶)이다.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단령에 사용하였다. 공복(公服)을 제외한 여러 관복에 사용하던 허리띠로, 왕의 홍정(紅鞓) 조옥대(雕玉帶), 왕세자의 흑정(黑鞓) 독옥대(禿玉帶), 왕세손의 수정대(水晶帶) 다음으로 귀한 품대이다.
조선 개국 이후 1416년(태종 16) 3월에 제복용 품대를 논의하였는데 『홍무예제(1381)』의 조복과 제복 품대 제도에 이등체강원칙을 적용하여 금(金, 1-2품), 은(銀, 3-4품), 동(銅, 5-9품)으로 정하였다. 이 때 논의된 품대 제도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와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1474)』와 같은 전례서에 명시되었다.
그러나 1485년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1393년 조복과 제복, 상복에 동일한 품대 제도를 적용한 명나라 제도에 이등체강원칙을 적용하되, 현실성을 고려하여 이등체강원칙에 따르면 사용할 수 없는 국속(國俗)의 1품용 서대를 국가의 제도로 수용하였다. 서대는 명나라의 2품이 사용하는 품대이므로 조선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세조 때 이미 왕의 특명으로 왕자 · 왕손 · 종실에게 서대를 띠게 하고 중국 사신이 와도 금대로 바꾸지 말도록 하였다. 1865년(고종 2)에 간행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까지 서대의 착용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서대의 구조는 다른 품대의 구조와 같다. 파손된 북[破鼓]의 가죽을 재활용한 띠 바탕인 정(鞓)에 청색 비단이나 가죽을 바르고 그 위에 띠돈 20개를 장착한다. 띠 바탕 정의 양식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다섯 조각을 사용하여 만든 분리형 띠와 세 조각을 사용하여 만든 일체형 띠로 구분된다. 허리 둘레에 맞추어 조절이 가능한 분리형 띠 구조에서 조절이 불가능한 일체형 띠 구조로 변화하였다. 분리형 띠에는 좌우 안쪽으로 허리 둘레에 맞추어 조절할 수 있는 버클이 있다.
품대에 사용하는 20개의 띠돈은 앞의 열고 닫을 수 있는 개폐 부분에 세 개의 띠돈을 사용하는데, 이를 삼태(三台)라고 한다. 그 안쪽에는 날름쇠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 실제적으로 열고 닫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앞에는 복숭아형의 남두육성(南斗六星)을 좌우에 각각 3개씩 달고 그 뒤로 가늘고 좁은 직사각형의 좌보(左輔)와 우필(右弼)을 각각 단다. 그 다음에 꽃 모양의 작은 금속 장식을 좌우에 상하로 한 쌍 달고 타미[撻尾]로 앞쪽 띠를 마감한다. 주우 보필과 타미 안쪽에는 뒤쪽 띠를 묶어 고정할 수 있는 금속 속아(束兒)가 있다. 앞쪽 띠의 안쪽으로 속아에 끼워져 연결되는 뒷쪽 띠의 바깥쪽 뒷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고 하는 7개의 직사각형 띠돈을 뒤쪽 허리 중앙을 중심으로 연이어 단다. 북두칠성을 고정한 철사가 안쪽으로 돌출되므로 배[北]라고 하는 것을 안쪽으로 고정시킨다. 종이를 접어 두텁게 만든 다음 초록색이나 남색 비단으로 써서 북두칠성을 고정시킨 철사 부분을 덮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 안에 고정한다. 이렇게 하면 띠가 완성된다.
대에 사용한 띠돈의 재료는 관계(官階)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품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서대는 물소[水牛]의 뿔로 띠돈을 만들었는데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료가 아니므로 중국 남방의 것을 수입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상당히 귀한 재료였다. 『탁지준절(度支準折)』에 서대[犀角帶]와 오각대[黑角帶]의 가격이 제시되어 있는데, 오각대 1부(部)의 가격이 2냥이었던 것에 반하여, 서각대 1부의 가격은 무려 오각대 가격의 75배에 해당되는 150냥이나 되었다. 이를 통해 비싼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질 좋은 서각은 중국 복주(福州)에서 생산되었는데 옥처럼 단단하고 무늬가 특이하였다고 한다. 통천서(通天犀)는 상품(上品)의 서각으로, 통서(通犀)라고도 하였는데 흰 줄이 있으며 옆에서 보면 묶은 머리를 자른 듯하고 물에 넣으면 괴이한 것을 잘 비춘다고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하응의 조복본이나 흑단령본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대의 서각이 통천서로 추정된다. 띠돈 중앙에 밝은 빛이 돌고 그 주위에 작은 원형의 짙은 갈색 무늬가 중앙에 밀집되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83년의 민태호(閔台鎬) 초상화나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1895년 신정희(申正熙, 1833-1895)의 초상화에서도 서각의 유사한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서대는 특히 19세기 후기의 초상화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서대는 밝은 갈색 바탕에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갈색 무늬가 있는데 대체로 세 종류로 나뉜다. 중앙에 포도송이처럼 묘사되어 있는 통천서 종류가 하나이고, 중앙에 검게 응집되어 번진 형태로 표현된 것, 그리고 띠돈 아래쪽으로 무늬가 치우쳐 있는 것이 있다. 초상화에는 서각의 검은 무늬를 아래쪽으로 배열하는 것이 흔히 확인된다.
서대의 띠돈에는 금속테를 두르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훼손되기 쉬운 삼태와 보 · 필, 타미와 같은 일부 띠돈에 금속테를 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남두육성과 북두칠성에 해당하는 띠돈에는 금속테를 두르지 않았다. 서대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남두육성이나 북두칠성 띠돈을 확인해야 한다. 초상화에서는 삼태에 금테를 두른 것과 두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삼태에 금테를 두르지 않은 것은 보 · 필이나 타미에도 테를 두르지 않지만 삼태에 금테를 두른 경우는 보 · 필과 타미에도 반드시 테를 둘렀다. 서대 유물 중에는 테를 두르지 않은 것보다는 테를 두른 경우가 더 많이 보인다. 이는 마찰이 심한 부위에 사용되는 서각 띠돈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후기의 서대 유물을 분석한 결과, 황동에 도금한 금테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