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조 부부묘 출토 유물은 조선 중종대의 문신인 김흠조(金欽祖, 1461~1528) 묘와 부인들의 묘에서 출토된 3종 134점의 일괄 유물이다. 1997년 3월 영주~평은간 국도 공사로 묘를 이장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복식류 66점, 문서류 38점, 기타 유물 30점으로, 조선 전기 관복 제도의 전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002년 7월 18일에 중요 민속 자료 제24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가 민속 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재지정되어 영주 소수서원 유물관에 소장 중이다.
1997년 3월 영주~평은간 국도 확장 공사로 김흠조 부부의 분묘를 이장하였는데, 이때 동묘이곽형(同墓異槨形)의 합장묘에서 복식류 66점, 문서류 38점, 기타 30점 등 총 3종 13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김흠조는 의성 김씨 17대손으로,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활약했으며, 말년에 정3품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지냈다. 복식류는 김흠조의 묘에서만 출토되었는데 단령 7점, 직령 2점, 답호 11점, 철릭 12점, 상의류 6점, 바지류 8점, 기타 염습 도구 20점이다. 문서류 역시 김흠조의 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인 만사(輓詞) 19점, 제문(祭文) 19점이다. 기타 유물은 김흠조와 부인들의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분청사기, 인화문 항아리를 비롯한 사기(砂器) 및 금속 · 유리 제품이다.
이들 유물은 조선 전기 사대부가의 복식 문화 연구와 상 · 장례 풍속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7월 18일에 중요 민속 자료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번호가 폐지되어 국가 민속 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재지정되었으며 현재 영주 소수서원의 유물관에 소장 중이다.
복식류는 단령(團領) 7점, 직령(直領) 2점, 답호(조끼류) 11점, 철릭 13점, 상의류 6점, 바지류 8점, 모자 1점, 도아 1점, 기타 등 66점이다. 둥근 깃이 특징인 단령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대표적인 관복이다. 김흠조의 묘에서는 7점의 단령이 수습되었다. 무명 단령 1점, 사면교직(絲綿交織) 단령 2점, 사저교직(絲苧交織) 단령 2점, 삼베 단령이 2점으로 모두 홑으로 제작되었다. 뒷길이 148158cm, 뒷품 6468cm, 화장 121~129cm의 범위로 길이와 화장이 매우 길다. 둥근 깃은 매우 좁고 작으며, 무의 형태는 윗부분이 삼각형으로 접혀 들어간 ‘대소 안팎주름형’이다.
옷깃이 곧은 직령은 조선 전기 사대부의 대표적인 상복이자 외출복이었으며 동시에 하급 관리의 관복이기도 하였다. 단령과 깃에서만 차이가 있는 직령은 2점이 출토되었지만 상태가 좋은 것은 무명 홑직령 1점이다. 곧은 깃에 긴소매가 달렸으며 트인 옆선에 ‘대소 안팎주름형’의 무가 달린 옷으로 깃을 제외하고는 단령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다. 간접 부착형 고름이 달렸다.
답호는 직령과 그 형태가 같으나 소의 길이가 짧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철릭의 웃옷으로도 입었으나 그 위에 관복을 입어 관복의 받침옷 역할을 하였다. 김흠조 묘에서는 답호가 11점이나 출토되었다. 고름의 형태는 직접 부착형과 간접 부착형으로 다양한 형식이다.
철릭은 조선 전기에 남자들의 평상복으로 가장 흔히 입었던 옷이다. 답호와 함께 관복의 받침옷으로 입혀지기도 하였으며 백관의 융복으로도 착용하였다. 형태는 곧은 깃에 상의와 주름 잡힌 하의가 연결되었다. 김흠조 묘에서는 12점의 철릭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는 솜철릭 2점, 겹철릭 3점, 홑철릭이 7점이며 교직과 명주, 무명, 삼베, 그리고 초(綃) 등 다양한 구성법과 직물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상의와 하의의 길이 비율이 1.2:1로 상의가 긴 형태이다.
등거리 1점은 겉과 안을 명주로 만든, 전단후장(前短後長)의 겹옷인데 소매의 배래선과 옆선이 완전히 트여 있고 겨드랑이와 소매 끝에 끈이 달려서 묶도록 되어 있는 독특한 형태의 옷이다. 저고리 1점 역시 안팎을 명주로 만들고 솜을 얇게 두었다. 이중 깃이 달렸는데 겉깃은 잘린 칼깃형이다. 한삼은 모두 4점이다. 삼베, 무명, 명주를 사용하였으며 모두 홑옷이다. 화장이 123.5~150cm의 범위로 매우 길다.
바지는 8점이다. 모두 여자의 단속곳처럼 부리가 넓은 것이 특징으로 밑이 막힌 합당고형이 3점이고 밑이 트인 개당고형이 5점이다. 임진왜란 이전 시 남자 바지가 여자 바지와 형태가 동일하다는 새로운 견해를 학계에 제시한 최초의 유물들이다. 이외에 공단으로 만든 겹 소모자와 광다회대가 있으며, 싸개, 삼베와 무명 주머니형 옷감, 멱목, 홑이불, 겹이불, 솜이불, 염포[絞], 명정, 지요, 버선, 충이(充耳) 등이 있다.
문서류 중 만사는 19점으로, 조문객들이 김흠조에 대해 칭송한 것과, 그들과 김흠조의 친분 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제문은 19점으로, 김흠조가 살아 있을 때의 행적을 그리면서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현하고 글을 지은 사람의 직함과 이름을 적었다. 기타 유물로는 분청사기, 인화문 항아리, 백자병 등 사기류와 동경(銅鏡), 철제 가위 등의 금속 제품, 유리제 장신구, 목관, 마제 자리 등을 포함한 30점이 있다.
출토복식의 대부분은 묘주가 생전에 착용하였던 복식류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복식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복식 제도는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양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출토 복식에 따르면, 왜란 이전의 남자 복식류는 단령, 답호, 철릭, 직령, 액추의 등의 포제류와 저고리류, 개당고와 합당고형의 바지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유물들에서 액추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복식이 확인되었다.
김흠조 부부묘 출토 유물은 조선 전반기의 출토복식이 많지 않은 시점에서 묘주의 인적 사항이 확실한 김흠조의 복식은 조선 전기 관복 제도의 전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김흠조의 바지는 임진왜란 이전의 남녀 바지가 형태가 같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하게 한 최초의 유물들이다. 이외에도 이 유물은 사대부가의 상 · 장례 풍속사에 대한 연구 자료 및 당대 문인들의 행적을 파악하는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