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대구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개금하다가 1점 발견되었다. 이 도포는 옅은 쪽빛의, 성근 평견 직물로 만든 홑옷으로, 겉깃의 모양이 목판 당코깃형이고 두 층의 뒷자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1740년(영조 16) 경신년(庚申年) 12월에 파계사의 대법당을 중수할 때 영조가 탱화 일천불을 희사하였으며, 이곳을 왕실을 위하여 기도하는 도량으로 삼고 영조대왕의 청사상의(靑紗上衣)를 복장(服臧)하여 만세 유전을 빌었다고 한다. 도포 뒷길의 등 부분 안쪽에 ‘건륭 5년 경신 12월 11일 복장기 성상주 갑술생 이씨 청사상의 일령 만세유전간 파계사자동가원오상 삼전탄일불공처야(乾隆五年 庚申 十二月 十一日 服臧記 聖上主甲戌生 李氏 靑紗上衣 一領 萬歲流專于 把溪寺者國家願堂 三殿誕日佛供處也)’라는 한지 묵서가 부착되어 있으며, 도포를 ‘청사상의’로 지칭하여 유물의 색상과 재질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 유물은 영조의 1740년 옷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색상이 남아 있는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복식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1987년 11월 23일 ‘영조대왕 도포(英祖大王道袍)’라는 지정 명칭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2024년부터는 국가민속문화유산에 해당한다. 현재 파계사에서 소장 중이다.
도포는 왕 이하 사대부의 외출복이자 의례복이었으며 또한 유생들의 옷이기도 했다.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가 달린 옷인데 앞자락의 옆선에 달린 커다란 두 조각의 무(이엽삼)가 뒷길 안쪽으로 들어가 뒷길 안쪽에 고정되거나 어깻바대인 한판(汗版)에 고정되어 두 층의 뒷자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까지 홑옷과 겹옷의 다양한 구성을 보였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홑 도포로만 전해진다.
영조대왕의 도포는 옅은 쪽빛의 성근 평견 직물로 만든 홑 도포이다. 길이 130㎝, 화장 119㎝, 품 54㎝, 소매통 65㎝의 크기이다. 재질은 한 바디에 경사 두 올씩을 끼워 제직하여 경사가 두 올씩 몰려 있는 변화 평직물인데, 시각적으로는 이경 익조직인 은조사와 유사할 정도로 성근 편이다. 깃은 겉깃이 목판 당코깃 형태이며 모시로 만든 동정이 달려있다. 소매는 넓은 두리소매 형태이며, 앞길 옆선에 삼각 형태의 무를 달았고, 연장된 좌우의 커다란 두 조각의 무(이엽삼)가 한판[어깨바대]이 없이 뒷길 안쪽에 직접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뒷자락의 옆도련은 약간 곡선으로 넓어지는 형이다. 영조대왕의 도포를 복장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된 한지 묵서는 도포의 뒷고대 안쪽에서 뒷길 아쪽 등부분까지 놓여져 꿰매져 있다.
당시 사대부가 입었던 도포의 깃은 대부분 칼깃인데 반하여 영조대왕의 도포는 목판 당코 깃이 달린 것이 특이한 점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호 중 광해군의 중치막도 같은 깃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신경유(申景裕, 1581~1633) 묘 출토 도포 12점 중 2점의 도포만 목판 당코 깃의 형태인 것으로 볼 때 이러한 형태의 깃 모양은 당시 왕실을 비롯한 특권 계층의 특별한 형태임을 증명하는 단서로 볼 수 있다.
도포는 왕 이하 사대부의 외출복이자 의례복이었으며 또한 유생들의 옷이기도 했다. 도포의 명칭은 1564년(명종 19)에 처음 확인되는데, 조선 전기에는 도포의 체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17세기 중기 이후 도포의 체제가 안정되면서 직령을 대신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예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영조의 아들 사도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1795)에는 영조가 용포(龍袍)의 받침옷으로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전기에 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조관(朝官) · 사서(士庶)가 웃옷으로 도포를 입었는데, 청색과 백색 두 가지가 있어 좋은 일에는 청색을 입었고 평시에는 백색을 입었다. 천민과 노비층에서는 입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1884년(고종 21)에 고종의 갑신의제개혁으로 소매 넓은 옷을 폐지하고 착수포(窄袖袍)를 입도록 하였으나 유생들의 반발로 제사나 조문 등의 예복으로는 도포를 다시 허용함에 따라 지금까지도 전통 의례에서 대표적인 남성 의례복으로 착용되고 있다.
도포는 뒷자락의 모양이 두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만 또 다른 특징으로 17세기 전기까지의 도포에는 앞길 좌우의 무인 이엽삼에 주름이 잡혀 있는 점이다.
도포 유물 중에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도포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이석명(李碩明, 15131583) 묘 출토 명주 겹도포, 임진왜란 직후의 강대호(姜大虎, 15411624) 묘 도포, 국립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약(金瀹, 1559~1625) 묘 도포 등이다. 이들에서 이엽삼에 주름이 잡힌 도포가 확인되며, 이후의 도포에서는 주름이 없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영조대왕의 도포는 이엽삼에 주름이 없는 조선 후기의 도포에 해당한다.
이 도포는 왕실 관련 복식 유물이 소략한 상태에서 영조대왕의 1740년 옷이라는 기록이 더하여져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복장물로서 형태와 색이 보존되어 복식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소매가 오랫동안 접혀진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접혀진 부분이 파손됨에 따라 2005년에 보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