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자관(子寬). 기묘명신 신상(申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신화국(申華國)이다. 아버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며, 영의정 신경진(申景禛)의 동생이다.
1603년(선조 36) 정시 무과에 장원급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과 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말년 형 신경진과 함께 왕을 축출하려는 모의에 가담하였다.
1623년 반정 당일에 동생 신경인(申景禋)과 함께 수하의 군졸을 이끌고 능양군(綾陽君: 뒤의 인조)의 호위부대에 합류, 그 선봉장으로서 제일 먼저 창의문(彰義門)에 돌입하였다. 반정 후 경기수사로 발탁되었다.
광해군 때의 권신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매부인 이대엽(李大燁: 李爾瞻의 아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다가 공을 믿고 국법을 무시한다는 승정원과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특히 승지와 사관(史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임금에게 사정(私情)을 말한 비례(非禮)는 전례 없는 일로서, 공신 발호의 조짐이라 하여 양사에서 죄주기를 청했으나 왕의 비호로 끝내 무사하였다.
인조 1년 윤10월의 논공행상 때 동생 신경인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동평군(東平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여 왕이 공주로 피난하자, 심기원(沈器遠)과 함께 특별히 호위대장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지나치게 사치한 집을 지은 일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 뒤 다시 황해도병마사가 되었으나 부임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부정이 탄로나 역시 파직되었다. 1627년(인조 5) 강원도 횡성에서 이인거(李仁居)의 반란이 발생하자 호위대장에 다시 특채되었다. 그 뒤 충청도 및 전라도병마사로 전보되었지만, 직권남용과 사리의 도모로 인해 모두 쫓겨났다.
1633년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북방경계강화책의 일환으로 도원수 김시양(金時讓)의 중군으로 특채되었다. 그러나 뇌물을 받고 일부 군관을 남방편읍(南方便邑)으로 빼돌린 사실이 적발되어 금고에 처해지고, 이후 관직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형 · 아우와 함께 3형제가 모두 무예에 능하고 뛰어난 데다 인조의 인척으로서 반정 원훈(元勳)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방자한 행동과 과도한 탐욕때문에 청서파(淸西派)로부터 잦은 탄핵을 받았다. 1834년(순조 34) 후손의 요청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경의(景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