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삼 ( | )

의생활
물품
조선 전기, 흑선 두른 단령형 옥색 유생복, 또는 조선 후기 생원 · 진사의 방방복으로 입던 흑선 두른 단령형의 녹색 예복.
이칭
이칭
앵삼(鶯衫)
물품
재질
견직물
용도
유생복|생진사 방방복
소장처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제작 시기
19세기
관련 의례
생진사 방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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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난삼은 조선 전기 흑선 두른 단령형 옥색 유생복, 또는 조선 후기 생원·진사의 방방복으로 입던 흑선 두른 단령형의 녹색 예복이다. 태종 11년(1411)부터 유생 복식으로 착용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이는 유생의 청금(靑衿)이 난삼이며 이후 청금은 유생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유생복으로 홍단령을 입게 됨에 따라 18세기 영조 대에 난삼에 대한 논의를 통해 생원과 진사의 방방복으로 입게 되었다. 난삼에 복두라고도 한 연건(軟巾)을 쓰고 목화를 신었으며 허리띠의 일종인 영대(鈴帶)를 어깨에 걸치는 방식으로 착용하였다.

정의
조선 전기, 흑선 두른 단령형 옥색 유생복, 또는 조선 후기 생원 · 진사의 방방복으로 입던 흑선 두른 단령형의 녹색 예복.
연원

명나라 홍무 24년(1391), 난삼을 국자감 생원의 복식으로 정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종 11년(1411), 명나라의 생원 복식 제도를 받아들여 15세기 유생 복식으로 난삼을 착용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제학생도(諸學生徒) 중 유생은 학교에 있을 때 치포건(緇布巾)에 청금을 착용한다고 하였는데 그 청금이 난삼이다.

변천 및 현황

이후 유생복은 난삼에서 홍단령으로 바뀌었다. 광해군 대에 중국 제도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유생에게 난삼을 입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17세기 중엽 이후 다시 난삼 제도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현종 말년에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등이 중국 제도에 의거하여 청금 · 복두를 생진사 신방(新榜)에 사용하기로 하고 연경(燕京)에서 구입하였으나 현종의 급작스런 승하로 중지되었다.

1746년(영조 22) 영조는 경상북도 안동 향교에 있는 복두 · 난삼 · 대대(大帶)를 가져다 살펴보고 이듬해인 1747년부터 난삼을 생 · 진사의 방방 복식으로 착용하도록 하였다. 영조가 난삼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윤봉구(尹鳳九, 1683∼1767)가 있었다. 윤봉구는 현종 때에도 이미 민정중 등의 건의로 난삼을 입도록 하였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난삼 제도를 부활시키도록 청하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윤봉구는 정자관에 난삼을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초상으로 남겼다. 윤봉구의 초상화는 현재 안동 권씨 화천군파 소장본과 미국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박물관 소장본이 전해지고 있다.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박물관 소장본은 1750년 변상벽(卞相璧, 생몰 미상)이 그렸다고 적혀 있다.

형태와 제작 방식

조선 전기의 난삼 형태는 명대(明代)의 출토 난삼이나 명나라 왕경(王琼) 초상화,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볼 수 있는데 검은 선을 두른 옥색 단령이다. 조선 후기의 난삼 형태는 윤봉구 초상화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현전하는 조선 후기 유물은 옥색이 아니라 앵무새의 색상과 비슷해 보인다. 난삼은 얇은 연두색 겉감에 노란 안감을 넣어 단령형으로 짓되, 깃과 수구, 좌우의 무(武) 가장자리와 밑단에 검은 선을 둘렀다.

『벽계영유록(碧鷄榮遊錄)』은 1825년(순조 25) 24세에 생원이 된 심동규(沈東圭, 1802∼미상)가 출방(出榜), 창방(唱榜), 사은(謝恩), 알성(謁聖), 유가(遊街), 도문연(到門宴)에 이르는 제반 일정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방방 시 필요한 물품과 복식을 기록해 두었다. 방방 시에는 앵삼(鶯衫), 복두(幞頭), 영대(鈴帶), 목화(木靴) 등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앵삼은 초록숙초(草綠熟綃) 겉감에 송화수주(松花水紬) 안감을 넣어 만들었고 가장자리에 흑색 통견(通絹)으로 선을 둘렀다.

관련 풍속

성해응(成海應 1769~1839)『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는 난삼의 색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난삼에는 녹색이 많은데 나이든 자는 청색을 입고 어린 자는 황록색을 입는다. 모두 옥색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이에 따라 색상을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시문집 『소호당집(韶濩堂集)』에는 생원에 입격한 것을 축하하는 시(詩)가 실려 있는데, ‘누런 앵삼이 가을 하늘에 비치니[黃鶯衫子映秋天] 이백 명 중에 가장 어리구나[二百人中最少年]’라고 하면서 세주에 ‘생원시나 진사시에 입격한 나이 어린 사람이 황삼(黃衫)을 입는데 그것을 앵삼이라 한다’고 하였다.

1937년 『일용비람기(日用備覽記)』에서도 ‘소과 입격자는 연건(軟巾) · 영대와 함께 난삼을 입는데 앵삼은 소년 진사가 착용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앵삼은 난삼의 일종으로, 젊은 생 · 진사 입격자가 착용하는 밝은 색상의 난삼임을 알 수 있다. 짙은 초록색 겉감에 황색 안감을 댄 스코틀랜드의 Perth Museum 소장 유물은 조선 후기 나이든 생진사 입격자의 청색 난삼이라고 할 수 있고, 연두색 사(紗) 겉감에 황색사 안감을 넣어 만든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은 조선 후기 소년 생진사 방방복으로 착용된 유물이다. 그러나 윤봉구 초상화의 난삼 색상은 황록색이라고 보면 색상의 관행은 19세기 후기에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난삼에 사용한다는 복두는 실제 연건이었다. 난삼(襴衫)을 입고 머리에 복두(幞頭)를 쓴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주실로 만든 연건(軟巾)을 썼다. 주자의 『가례(家禮)』에 복두를 쓰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난삼에는 복두를 쓰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복두와는 전혀 다른 연건을 썼다. 생진사 입격자의 난삼에는 영대라는 독특한 형태의 허리띠를 사용한다. 세조대 형태의 가는 끈에 망수로 싼 4개의 금칠을 한 나무 구슬을 꿰어 원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허리에 두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걸쳐 뒤로 잡아당긴 끈을 앞으로 당겨 양 어깨에 걸치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착장법이다.

참고문헌

원전

『大明會典』
『林下筆記』
『碧鷄榮遊錄』
『三才圖會』
『韶濩堂集』
『硏經齋全集』
『日用備覽記』
『太學志』

단행본

中国織繡服飾全集編輯委員會, 『中國織繡服飾全集 4』(天津: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04)
杨新, 『明淸肖像画』(香港: 商务印书馆, 2008)
『초상화의 비밀』(국립중앙박물관, 2011)

논문

진덕순·이은주, 「조선시대 생원⋅진사의 방방 복식제도」(『국학연구』 45, 한국국학진흥원, 2021)

인터넷 자료

조선왕조실록(https://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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