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時服)은 사모(紗帽) · 단령(團領) · 품대(品帶) · 흑화(黑靴)로 구성된 조선시대 문무백관의 관복이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명나라에서 사모와 단령을 가져와 관리들이 관복으로 착용할 것을 건의하면서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 대에 서민의 단령의(團領衣) 착용을 금하면서 단령은 확실하게 관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시복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는데, 대략 4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제1기에 해당하는 조선 초기는 단령을 시복 또는 상복(常服)이라고 하였다. 동일 의례에서 사용된 복식의 명칭을 분석한 결과, 시복과 상복 명칭이 동일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실록』에서는 ‘시복’이라고 기록한 반면, 『오례의』에서는 ‘상복’이라고 기록하였다. 단령의 색상 규제는 원칙적으로 없어 ‘잡색(雜色)’ 단령을 착용하는 시기였으나 태종 대 이후 조정의 위의(威儀)와 문채(文彩)를 위하여 옅은 색상의 단령 착용을 금하고 짙은 색상의 채의(彩衣)를 권장하면서 심남색, 홍색, 흑색 등을 착용하는 규정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제2기는 단령의 색상에 의해 용도가 분화되는 시기인데 여전히 시복의 개념은 뚜렷하지 않았다. 1446년(세종 28) 이후 상참(常參) · 조참(朝參)에 입을 ‘흑염조의(黑染朝衣)’ 규정을 마련하면서 색상에 의해 ‘의례용’과 ‘집무용’ 단령으로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의례용으로 착용한 좋은 소재의 아청색 단령을 ‘예복(禮服)’이라고 칭하였다.
제3기는 단령의 명칭이 분화되어 시복이 ‘흑염조의’에서 비롯된 ‘흑단령’을 의미하는 시기이다. 1490년을 전후한 성종 말기에 상복과 구별되는 명칭으로 시복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중종 대에는 구체적으로 의례용 단령인 아청색 흑단령을 ‘시복’으로 칭하고, 집무용 단령인 홍단령을 ‘상복’으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시복 개념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대 초까지 이어졌다. 무늬 있는 고급 직물이 허용되었던 당상관의 의례용 시복인 흑단령에는 흉배를 달아 더욱 문채가 있도록 한 반면, 집무용인 상복은 잡색에서 홍색으로 단일화되면서 견이나 면 등과 같은 소박한 소재를 사용하였다.
제4기는 시복이 홍단령을 의미하는 시기이다. 1610년(광해 2) “전시(殿試)를 행할 때 독권관(讀券官)과 대독관(對讀官)은 모두 상복(常服)을 입는다.”는 『오례의』 기록에 근거하여 흑단령을 상복으로 인식함에 따라 이후 시복으로 인식되었던 흑단령을 상복이라 칭하고 상복이었던 홍단령을 시복으로 부르게 되었다. 명칭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조선 초기의 시복과 상복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던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으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고 잊혀졌던 것에 원인이 있다.
그러나 시복은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의례용’과 ‘집무용’이라는 단령 제도의 이중 구조, 그리고 용도에 따른 일관성 있는 색상 유지는 관복 제도가 간소화되는 고종 대까지 지속되었다. 의례용 단령인 흑단령은 조참이나 상참, 조계 그리고 칙서를 받을 때, 회례연이나 사신을 영접할 때, 제관이 향을 받을 때, 관리들이 진현할 때, 중국에 입조할 때와 같은 특정한 국가 의례에 사용되었으므로 고급 소재에 흉배 장식까지 더하여 조정의 위의를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집무용 단령인 홍단령은 잡색에서 토홍색으로 정착되면서 검소함을 중시하여 흉배는 물론 달지 않았으며 소재도 소박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사모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조의 모자로, 뒤쪽에 수평의 뿔[角]을 좌우로 꽂았다. 당상관은 무늬가 있는 뿔을, 당하관은 무늬 없는 뿔을 꽂았다. 모자와 뿔의 세부적인 형태는 착용 시기를 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하였다. 중종 대 이후 당상관의 뿔에는 운보문(雲寶紋)이 표현되기 시작하였는데 숙종 대 이후부터는 무아레 문양의 문사각(紋紗角)으로 바뀌었다. 단령은 깃이 둥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깃 너비나 깊이, 소매 너비, 무의 구조 등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세종 대 이후, 아청색을 단령을 착용하게 됨에 따라 예복으로 불리우다가 성종 대 이후 광해군 초까지 아청색 단령을 시복으로 불렸다. 시복 아청색 단령에는 3품 이상 흉배를 사용하였다. 1610년 이후 시복은 홍단령으로 변경되었다. 당상관의 시복 홍단령은 옅은 분홍색인 담홍색을 사용하였으나 당하관의 시복 홍단령은 색상이 짙어졌다. 이를 당하관의 사치로 여긴 영조는 1757년(영조 33) 당하관의 시복 홍포를 금하고 융복 외에는 녹포(綠袍)를 착용하도록 함에 당하관의 시복은 녹포로 바뀌었다. 1884년 시복 홍단령 제도가 폐지되었다.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는데 흉배 부착 여부에 따라 대례복과 소례복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품대는 품계에 따라 띠돈 또는 띠돈의 테두리 재료가 달랐는데 1품은 서대(犀帶), 정2품은 삽금대(鈒金帶), 종2품은 소금대(素金帶), 정3품은 삽은대(鈒銀帶), 종3품과 4품은 소은대(素銀帶), 5품 이하는 흑각대(黑角帶)를 사용하였다. 흑화는 신목이 있는 부츠형 신발로, 둥근 형태의 신발 코가 위로 들린 것이 특징이며 영조 대까지는 신목의 길이가 길었으나 점차 신목의 길이가 짧아졌으며 신코의 형태가 변화하기도 하였다. 흑화 안에는 모직이나 가죽으로 만든 전용 버선 정(精) 또는 청(淸)을 신었으며 추울 때나 비가 올 때는 분투(分套)라고 하는 가죽 덧신을 겹쳐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