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토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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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묘(墓)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관(棺) 속에서 수습된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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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출토복식은 조선시대에 묘(墓)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관(棺) 속에서 수습된 복식이다. 여기에 관을 꾸밀 때 사용되는 기타 제구들을 포함하여 ‘출토 유물’이라 부른다. 출토복식은 대부분 조선시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에서 발견되며, 망자가 살아 있을 때 입었던 옷과 친지들이 관 속에 넣어주는 옷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백 년 동안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색상은 모두 갈변되었으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의
조선시대, 묘(墓)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관(棺) 속에서 수습된 복식.
연원

나라에서 시행하는 토지 개발이나 조상의 유택(幽宅) 관리 등의 이유로 조상의 묘(墓)를 이장할 때는 나무로 된 내관(內棺)에서 미라 상태나 육탈된 시신과 함께 옷들이 출토된다. 복식학계에서는 이처럼 무덤의 관 속에서 출토되는 옷을 ‘출토복식(出土服飾)’이라 명명하였다. 출토복식은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근거하여 시신을 매장하는 장례 방식을 따랐던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망자가 살아 있을 때 입었던 옷이나 친지들이 관 속에 넣어준 옷으로 구성되어 있다.

' 수의(壽衣 · 襲衣)- 소렴(小斂)- 대렴(大斂)-보공(補空)'의 순으로 관 속을 옷으로 가득 채워 주었으며, “염(斂)을 할 때에는 죽은 자가 평소 입던 옷을 적절히 쓴다.”고 하였으니 출토복식은 묘주(墓主)의 생존 시기의 의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최초 출토복식의 사례는 1941년 경기도 시흥에서 출토된 ‘이형(李泂)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의복’ 6점( 국가민속문화유산)인데, 이 당시에는 수의로 취급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개관 기념 행사로 “광주이씨(廣州李氏) 수의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학계가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지속된 40여 년의 연구 성과는 묘주를 알 수 없더라도 옷의 조형성만으로 묘주의 생존 시기를 판별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는 출토복식의 가치와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 발굴 단체 · 사학계 · 복식학계 · 의학계가 참여하는 학제 간의 공동 연구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내용

『가례』에서는 관 속에 옷을 많이 넣어 주는 풍습은 시신의 흉한 모습을 후손들에게 보이기 꺼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관 속에 옷을 많이 넣어 준 풍습은 옷으로 시신을 싸서 시신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시신에게 입히고 싸기 위한 옷들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순서에 따라 수의를 착장시키고, 수의 위를 옷으로 싸는 소렴의(小斂衣)와 소렴금(小斂衾), 그 위를 다시 옷으로 싸 주는 대렴의(大斂衣)와 대렴금(大斂衾)의 순으로 시신을 감싸주었다. 완성된 대렴 상태를 관 속에 모신 후 빈 공간을 옷 등으로 빈틈없이 채워 주는 것이 보공의(補空衣)이다. 이외에 출토복식에는 죽은 자가 누구인지를 기록해 관을 덮어놓은 명정(銘旌), 그리고 관의 덮개인 구의(柩衣) 등, 다양한 치관제구(治棺諸具)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관은 한 치의 빈틈이 없이 옷들로 채워진다. 이 옷들은 수 백 년 동안 땅속에서 그 섬유가 소멸되거나 퇴화되기도 하고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가례』의 장례 방식을 따랐던 16~17세기 중반기까지는 관을 두터운 회곽(灰槨)(또는 회격(灰隔))에 이중 관(외관과 내관)을 사용하는 등의 방법을 취하였기 때문에 유물이 부패하지 않을 환경이 잘 조성되어 완형의 복식으로 남아 있다. 수백 년 동안 땅속에서 옷의 색상이 대부분 갈변되었고, 섬유가 심하게 퇴화되어 원형이 훼손된 상태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완형의 옷이라 하여도 부분적 소실이 있으며, 장례 풍속에 따라 고름을 떼어 내거나 잘라낸 상태로 염을 하여 고름이 소실된 경우도 있다. 또한 토양의 특색으로 동물성 섬유 또는 식물성 섬유가 퇴화되고 나머지 한 종류만 출토되는 경우도 있어 겹, 솜, 누비의 분별에 어려움이 있기도 한다.

출토복식은 당대에 사대부가 실제 입었던 옷들이기에 복식의 종류를 보면 복식의 시대적 유행과 소멸 여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복식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분수령으로 임진왜란 전과 후로 대별되어 복식 제도와 복식 형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남녀 의생활 구조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나타난다. 남자의 복식은 바지와 저고리, 배자 외에 단령(團領), 직령(直領), 답호(褡護), 철릭[貼裏], 과두(裹肚), 장유(長襦), 액주름[腋注音], 심의(深衣), 도포(道袍), 중치막(中致莫), 창의(氅衣), 두루마기 등이 출토되어 길이가 긴 포(袍)가 많은 편이다. 동일한 옷이라도 세부 형태에 있어 변화가 있으며 액주름이나 답호처럼 임진왜란 직후에 소멸되는 복식이 있는가 하면 창의나 광수주의(廣袖周衣), 협수(夾袖), 동다리(同多里), 전복(戰服), 괘자(掛子)처럼 새로이 등장하는 옷도 있다. 바지는 임진왜란 이전의 여성의 단속곳과 비슷한 형태이었으나 이후에는 지금의 사폭 바지와 같은 모양이 지속된다.

여성의 복식류는 머리에 쓰는 너울, 가리마, 족두리가 있으며 외출복인 장옷[長衣], 단령형 원삼(圓衫)과 대금형 원삼, 노의(露衣)가 있다. 이외에 다양한 모양의 저고리(赤古里) 종류 중심의 구조를 보였다. 저고리는 시대별로 뚜렷한 특징을 보여 유행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16세기는 허리를 가리는 장대형(長大形) 저고리, 17세기는 치마허리를 맴도는 단소형(短小形) 저고리, 18세기는 치마허리가 드러나는 맞춤형 저고리,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는 가슴이 노출되는 일자형 저고리 형태로 변화하였다.

조선시대 복식의 출토 사례는 연구 기관에 따라 건수 판별 기준이 다르고, 출토 사례가 매년 추가되기 때문에 데이터는 유동적이다. 학계에 발표된 복식 출토 사례를 중심으로 개인 판별 기준으로 집계한 수량은 2022년까지 약 200건에 이르고 있다. 묘주(墓主)의 생몰년은 150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광범위하다. 그중에서도 1500년대와 1600년대에 해당하는 분묘의 수가 가장 많은데, 회격묘(灰隔墓)를 쓰는 묘제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출토복식은 지역적으로는 경기도의 출토 사례가 가장 많다. 1963년 경기도 광주 출토 청연군주(淸衍郡主) 집안의 유물을 비롯하여 2008년 경기도 파주 출토 심지원(沈之源) 집안의 출토 유물에 이르기까지 총 80여 건에 이르고 있다. 경기 지역은 한양의 인접 지역이었고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가장 최적의 묘역(墓域)으로 평가된 지역적 특성과 1980년 전후로 수도권 우선의 국토 개발이 진행되어 타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출토 사례를 보인다. 그동안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충북대학교 박물관, 경기도박물관 등 특정 기관에 집중되었던 출토 사례와 소장처는 2000년대 들어서는 지방 자치제가 정착되고 지역 개발이 활발해져 전국 각지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2010년부터 시작된 세종특별자치시와 인근 개발 지역에서 출토 사례가 증가하여 대전역사박물관 등에 소장된 출토 복식이 증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의의 및 평가

출토복식은 땅속에서 수백 년 동안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본래의 색상이 탈색되거나 파손된 유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시기(全時期)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옷들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복식과 의생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한국복식』 24(2006)
안동대학교 박물관, 『안동 정상동 일선문씨와 이응태묘 발굴조사보고서』(2001)

논문

고부자, 「조선시대 출토복식 정리현황 및 과제」(『전통의생활연구』 4,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 2009)

인터넷 자료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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