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이 곧은 데에서 나온 명칭인데, 직령으로 된 포(袍)를 그대로 직령이라 하기도 한다. 포로서의 직령은 교임(交衽)에 중거형(重裾型)이었다. 우리 고유복식의 포는 직령에 교임·직수형(直垂型)이고 착수(窄袖)이며, 깃·도련·소맷부리에 가선(加襈)을 하고 띠를 매었다.
고려에 내려와서 중국 포제인 중단(中單)의 영향을 받아 직령·교임·중거형이 되고 선이 없어졌으며, 속대를 맨 백저포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착용하던 직령은 고려시대의 이 백저포가 원나라 복속기(服屬期)에 그들의 일색의(一色衣)인 질손(質孫)의 영향을 받고, 또한 명나라 직령과 융합하면서 자연발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직령은 원래 우리 나라 옛 포제에 있어서와 같이 착수는 아니고 약간 관수(寬袖)인데, 중기에는 관포대수(寬袍大袖)가 유행하였고, 또 토홍직령(土紅直領)을 즐겨 입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종 31년(1449)에 내린 금제(禁制) 중에는 “서인(庶人)·공상(工商)·천례(賤隷)는 직령·겹주음첩리(裌注音帖裏)를 통착(通着)한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직령이 서인복으로 지정된 것을 비롯하여 하료(下僚)들의 공복(公服)으로 국속(國俗) 복식의 주류를 이루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 보이는 향리(鄕吏)·별감(別監)의 상복(常服), 궐내(闕內) 각 차비(差備)의 예복(例服)이 그것이며, ≪속대전≫에 보이는 별감·수복(守僕)의 홍직령(紅直領)이 그것이다.
또한, ≪경도잡지 京都雜志≫ 풍속조(風俗條)에 의하면 “후세에 와서 직령은 무관(武官)의 상착(常着)이 되었는바, 그것은 마치 문관(文官)에 있어서의 도포(道袍)가 상복이 된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이 직령은 1884년의 복제변통시(服制變通時) 도포·창의(氅衣) 등 다른 광수의(廣袖衣)와 함께 착수의(窄袖衣)·전복(戰服)·사대(絲帶)로 대체되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