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너울과 같으나 다른점은 베로 만든점과 모정(帽頂)에 베로 만든 꽃이 달려 있는 점이다.
개두(蓋頭)의 형태는 『세종실록』 오례의 중 흉례복제(凶禮服制)에 개두는 본국의 여자의 입모(笠帽)로 대신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두와 입모, 즉 너울이 같았음을 알 수 있으며,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행렬도 중의 개두와 『가례도감의궤』 행렬도 중의 너울의 형태가 같았다.
조선 『태종실록』 8년 5월 예조에서 상정한 태조 승하시 상복(喪服)을 보면 정비전(靜妃殿), 대비, 숙빈, 궁주, 옹주, 각전시녀 상복에 개두가 처음 보인 후 계속해서 국상 때 개두가 사용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 1808∼1890, 조대비) 상제(祥祭) 의대발기(衣襨發記)에도 조라(皂羅) 개두가 보였다.
중국의 개두는 송인(宋人) 주휘(周煇)의 『청파잡지(淸波雜志)』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각형 천[紫羅]으로 몸을 가리는 것을 속칭 개두라 하며 당(唐)의 유모제(帷帽制)라고 하였다.
고려의 여인들도 개두를 사용했음을 『계림유사』(고려 숙종(1096∼1105)에서 “고려……여자 개두……”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여인들은 송에서 들어온 개두를 몽수(蒙首)와 함께 장식용으로 사용했다고 보며, 송에서 고려에 전해진 개두가 조선시대에는 베로 만들어 국상 때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개두의 형태에 관한 도설이 『국조속오례의』 서례(序例)에 있는데,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는 개두 유물과 같다. 즉 푸른대로 둥글게 테를 만들되,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게 하여 흰 명주로 안을 바르고 테 위에 베를 씌운 것으로 모정에는 베로 만든 꽃 세개를 포개어 붙인다. 속칭 여입모(女笠帽)이다.
상장(喪裝)과 상복기간에 따라 옷감이 조금씩 달랐으나 거의 초세생포(稍細生布)를 사용하며 상복기간의 경과에 따라 백색에서 흑색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