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 판판하고 겉은 퉁퉁하게 만든 두 쪽의 고리로 되어 있다. 한 짝으로 된 것은 반지라고 한다. 지환(指環)은 가락지와 반지의 총칭이면서, 가락지만을 뜻하기도 한다. 가락지의 유물은 조선시대 이후의 것만 볼 수 있다. 당시 가락지는 기혼여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미혼여자는 반지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볼 때 가락지는 조선시대가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그 사상이 생활윤리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이므로, 혼례를 인간 대사의 하나로 삼는 가운데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표지로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락지는 한 짝의 고리인 반지를 두 짝으로 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지나 가락지나 그 재료나 기교면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유물에 의하면 재료는 도금(鍍金) 또는 은(銀)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명나라에 대한 진공(進貢)이 어려웠을 뿐더러 면진공정책(免進貢政策)을 위해서도 금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 칠보 · 옥 · 마노 · 호박 · 비취 · 진주 · 구리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상류사회나 궁중에서는 계절에 따라 다른 재료의 가락지를 끼었다.
헌종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의 『사절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自藏要覽)』에도 “가락지는 10월부터 정월까지 금지환을 끼고, 2월과 4월은 은칠보지환을 낀다. 5월 단오 견사당의(絹紗唐衣)를 입을 때에는 옥지환이나 마노지환을 낀다.
또 8월 한더위에는 광사당의(光紗唐衣)를 입을 때에 칠보지환을 끼어 9월 공단당의(貢緞唐衣)를 입을 때까지 계속한다.
규칙이 이러하니 여름에는 금을 못 끼고, 겨울에는 옥을 못 끼나 춘추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낀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다양하였던 조선시대의 가락지는 기교면에 있어서는 전대의 것에 비하여 단순한 면이 있어, 오히려 그 단순성이 조선시대의 특징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말엽 순종이 세자 당시 가례 때 빈궁(嬪宮)에게 내린 가락지는 다음과 같다. 재간택(再揀擇) 후 순금산호지환 · 산호지환 각 1쌍, 삼간택 후 진주장도금이지환(眞珠粧鍍金―指環) · 산호지환 · 밀화지환(蜜花指環) · 순금지환 각 1쌍, 가례 때에 진주장산호지환 · 진주장금패지환(眞珠粧錦貝指環) · 진주장자마노지환 · 비취옥지환 · 밀화지환 · 옥지환 · 공작석지환(孔雀石指環) 각 1쌍 등이다.
이것들이 조선시대 가락지의 대표적인 것들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