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원소기호 Au로서 구리족에 속하는 황색의 금속이다. 산화작용을 받지 않는 불변의 금속으로 광택이 찬란하고 희귀하여 예로부터 귀금속으로 취급받았고, 전성과 연성이 좋아 공예품의 재료로 사랑받아왔다. 금의 순도는 캐럿(K)으로 표시하는데 금 100%면 24K, 60%면 14K이다. 우리나라에는 금광이 전국적으로 존재하며 문헌기록을 보면 기원전부터 금을 애용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금으로 제작된 화려한 유물들은 우리 민족이 야금술과 세공술에도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금은 현재도 전자공업 등의 첨단산업에 사용되는 필수 금속으로, 그리고 부의 저장수단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등축정계(等軸晶系)에 속하나 보통 엽상(葉狀) · 입상(粒狀) · 수지상(樹枝狀) · 스펀지상 · 괴상(塊狀)으로 산출된다. 산화작용을 받지 않고 왕수(王水) 외에는 녹일 수 없다. 전성(展性)이 커서 0.0001㎜까지의 얇은 금박(金箔)으로 만들 수 있으며, 연성(延性)이 좋아 1g의 금으로 3.3㎞ 이상의 가는 줄로 뽑을 수도 있고 0.6㎡까지 펼 수도 있다. 성질이 연하여 가공하기가 쉽고 광택이 찬란하며 희귀하여 예로부터 귀금속의 취급을 받아 화폐 · 공예품에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다. 비중은 16∼19, 경도는 2.5∼3으로 은이나 동을 첨가하여 경도를 높여 가공한다.
금 70%와 은 30%의 합금을 녹금(綠金, green gold)이라 하고, 가공 때 소량의 동(구리)을 첨가하면 색과 광택이 한층 아름다워지나 은을 첨가할 경우에는 금색이 감소하고 은색을 더 띠게 된다. 금의 순도(純度)는 캐럿(karat, 단위는 K)으로 표시하여 100% 금일 때는 24K, 금 75%에 은 · 동이 25%일 때 18K, 금이 약 60%의 순도일 때 14K로 표시한다.
금은 캘러버라이트(calaverite, AuTe₂) · 실바나이트(sylvanite, AuAgTe₄) · 크레너라이트(krennerite, AuTe₂) · 펫자이트(petzite, Ag₃AuTe₂) 등의 테루르화합물로도 드물게 산출되지만, 대부분은 자연금 상태로 산출된다. 자연금의 경우에도 100% 순수한 상태가 아니라 은 성분이 혼합되어 나타나는데 은 함량 20% 이상의 경우를 엘렉트럼(electrum)이라 한다. 광산에서 산출되는 조금은(粗金銀), 즉 청금(靑金)이라 부르는 것은 은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금이다.
우리 나라는 금광구(金鑛區)를 갖지 않은 군(郡)이 별로 없을 정도로 전국에 걸쳐 넓게 부존양상을 띤다. 우리 나라 제1의 금 산출지는 평안북도로서 운산 · 대유동 · 창성 · 구성 · 신연 · 의주 등지는 저명한 대금광산이다. 충청남도 · 강원도는 중 · 소규모의 금광산이 많이 개발되어 가행광산수로는 평안북도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나 산금액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반면에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가행광산수는 많지 않으나 수안 · 율포 · 해주 · 성흥 등에 대규모 광산들이 있었다. 이 밖에도 경기도의 삼보 · 영중, 충청북도의 태창 · 무극, 충청남도의 구봉 · 임천, 강원도의 홍천 · 옥계, 전북특별자치도의 금구, 전라남도의 광양, 경상북도의 상주 · 금정 등이 유명한 광산들이다. 일반적으로 남한 쪽에는 금광맥이 많지만 함금률(含金率)이 높고 소규모적인 것이 특징이다.
우리 나라에서 금을 배태하고 있는 광상은 열수충진맥상광상(熱水充塡脈狀鑛床) · 접촉교대광상(接觸交代鑛床) · 알라스카이트(alaskite) 및 페그마타이트(pegmatite)광상 · 사금광상(砂金鑛床)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열수충진맥상광상은 우리 나라 금광상의 70∼80%를 차지하며, 생성온도, 압력조건, 관계화성암체(關係火成巖體)와의 공간적 거리 등을 고려하여 심열수(深熱水) · 중열수(中熱水) · 천열수(淺熱水)로 나누어진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심열수 내지 중열수충진맥상광상에서 금이 산출되어 소위 조선식 금은광맥(朝鮮式金銀鑛脈)이라 일컬어지고 있을 정도이다. 광상이 배태된 모암(母巖)은 주로 화강암(花崗巖)과 화강편마암(花崗片麻巖)이며, 중생대(中生代) 말기에 관입한 화강암과의 성인적 관계가 깊다.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광산들로는 평안북도 운산 · 창성 · 구성 · 삭주 · 의주 · 선천, 평안남도 성천, 함경남도 함흥 · 장진 · 신흥, 함경북도 부령, 강원도 홍천, 황해도 해주 · 옹진, 경기도 여주, 충청남도 천안, 경상북도 상주, 전라남도 광양 등이 있다.
천열수충진맥상광상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지 않으나, 경상남도 통영, 경상북도 영덕광산이 이에 속하며, 한반도 남부에 발달된 신라통(新羅統) 중에는 통영형의 천열수 금은광맥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천열수충진맥상광상의 특징으로는 매우 미세한 광물들이 밀집되어 맥 중에 흑색의 띠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 금 · 은이 특히 집중되어 나타난다.
알라스카이트 및 페그마타이트광상은 모암이 열수충진맥상광상과는 달리 알라스카이트(주로 석영과 칼리장석으로 되어 유색광물을 거의 포함하지 않은 암석)와 페그마타이트(예외적으로 거정질의 광물로 구성되어 있는 화성암체)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알라스카이트광상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금정광산이 있고, 페그마타이트에 금을 배태하고 있는 경우는 전주광산이 있다.
접촉교대광상은 원생대(原生代) 상원계(祥原系)의 석회암 돌로마이트층이나 고생대(古生代) 조선계(朝鮮系)의 석회암층과 이들을 관입한 화강암체와의 접촉부에 불규칙한 괴상으로 산출되고 있는데, 대부분 동 · 연 · 아연 · 철 등의 유화광물체에 금 · 은이 부산물로서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광산으로는 연화 · 울진 · 수산 등으로서 이러한 유형의 광산수는 많지는 않으나 광산의 규모가 맥상광산에 비하여 커서 전체 금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사금광상은 금광맥이 풍화작용에 의하여 분해, 붕괴되어 자연금과 사력(砂礫)이 함께 우수 또는 하천에 의하여 운반되다가 침적되어 형성된 광상이므로 열수충진맥상광상이 발달된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금광상의 대표적인 분포지는 천안 · 광천 · 홍성 일대인데, 이들 지역 사금광상에서의 산금량이 민족항일기에는 금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활발히 가행(稼行)되던 광산들이다. 사금 가운데에는 금광맥이 붕괴된 채 토사와 함께 잔류하여 멀리 운반되지 못한 것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토금(土金)이라 한다.
삼국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오던 것으로 여겨지는 전통적인 금제련법으로는 기술적으로 별로 어려움이 없이 행해지던 사금제련이 있다. 이는 사금을 도가니 속에 넣고 금이 완전히 용융하였을 때 방망이로 도가니를 가볍게 두드리면 금은 엷은 조각으로 굳어지게 되고, 황토에 소금을 섞어 금 조각을 싸서 다시 불 위에 구우면 아주 좋은 엽자금(葉子金)이 된다. 이 엽자금은 모래 위에 금 조각을 놓고 몇 겹을 철사로 잘 묶어서 불에 달구면 금이 차차 엷어지면서 빛이 붉어져간다.
그러나 오늘날 금의 선광 및 제련을 위해 쓰이는 방법으로는 도태법(淘汰法, washing process) · 혼홍법(混汞法, amalgamation) · 청화법(靑化法, cyanide process) · 용융법(熔融法, smelting process) 등이 있다. 도태법은 금의 비중이 큰 성질을 이용하여 사력이나 다른 광물들로부터 금을 분리해내는 방법으로서 주로 사금채취에 널리 이용되어 오던 방법이다. 사금이 아닐 경우에도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금이 포함되어 있는 광석을 잘게 깨뜨린 뒤 사금을 분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금을 채취하였다.
혼홍법은 금과 수은의 화합물인 아말감(amalgam)을 만들고 이것을 가열하여 수은을 증발시킴으로써 금을 얻어내는 방법인데, 채취율이 낮아서 보통 함금량의 절반 정도밖에 얻어내지 못한다. 청화법은 금광석의 분말을 0.5∼10%의 청산가리수용액에 며칠 동안 넣어 금을 용해시킨 뒤 이 액체를 아연사(亞鉛絲)나 아연설(亞鉛屑)이 들어 있는 상자를 통과시켜 금만을 아연에 침전, 부착시키고 이것을 용융하여 금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는 금을 90% 정도까지 얻어낼 수 있다. 용융법은 여러 광물이 혼합되어 있는 광석덩어리를 용광로에 처리하여 금을 얻어내는 방법으로서 앞의 세 가지 방법이 습식(濕式)인 데 반하여 이는 건식제련법(乾式製鍊法)이다.
고대에 금은 주로 공예품 · 장식품 · 기명(器皿) · 불상 제작에 쓰였으며, 중국 · 일본과의 외교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는 금을 이용하여 화폐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금은 주로 국용(國用)과 사대(事大)를 위하여 쓰였는데, 15세기에 왕실과 관료들의 복식 · 기명 · 제구(祭具)에 금이 사용되었다. 조선개국 초부터 1429년(세종 11)까지 37년간, 1481년(성종 12)부터 1484년까지 4년간을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뜻으로 해마다 각각 금 150냥(兩)과 40냥씩을 조공하는 데 썼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는 채금사업(採金事業)에 동원된 농민들에게 노임의 지불수단으로서 금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1780년(정조 4)부터 1806년(순조 6)까지 실시된 계사제(計士制)하의 금광업정책에서 정부는 사금채취의 부역에 투입된 금군(金軍)들에게 따로 노임을 지불하지 않고 현지에서 채굴된 금으로써 노동의 대가를 해결하여 주었던 것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이후에는 금이 화폐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거래되었으며 청나라와의 무역에서는 값진 수출품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산업이 발달되면서 금의 사용은 좀더 다양화되어 오늘날의 금의 용도는 금화 · 금은세공 · 금은 도금 등의 화폐 · 장식용, 의치 · 치과장비제작의 치과용, 전기도금 · 금사(金絲) · 반도체연결선 등의 전자공업용 외에 미사일 · 로켓의 칠, 액체금속 등에 이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유통관계로 추정해볼 때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장신구용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금광업의 기원은 기록된 문헌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에 상으로 황금 30근을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기원전부터 조상들은 금을 애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고적에서 발굴된 금제의 기명 · 장식품 · 불상 등으로부터 고대에 이미 금광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정교한 기술과 세련된 야금술이 매우 놀라웠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일본에 금 · 은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일이 있고, 백제 · 신라도 일본 · 중국에 금 이외의 여러 공예품을 보낸 적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일성이사금 11년(144)에 백성의 금 · 은 · 주옥 사용을 금하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 초기에 금의 사용이 대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285년에 일본으로 야금술을 전하였고, 552년에는 임성태자(琳聖太子)가 광업기술을 전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는 이미 어느 정도 광업기술이 발달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밖에 삼국시대의 금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라 성덕왕 29년(730)에 당나라 현종에게 금 2천 냥을 진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사금생산의 격감으로 인하여 산금은 석금(石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석금의 채굴이나 제련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금광업은 쇠퇴하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31년 (1381)에 양부(兩府)로부터 6품(六品)에 이르기까지 금 · 은을 바치게 하여 주전(鑄錢) 후 다시 돌려주었음은 당시 금생산이 부족하였음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는 금 · 은세공품을 만들기 위한 관서(官署)로서 장야서(掌冶署)가 있었고 금의 채굴에 관한 기록으로서 충렬왕 3년(1276)에 최석(崔錫)이 인부 1만1446명을 거느리고 홍천 · 직산 · 정선에서 70일 동안에 금 7냥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주로 무기제조를 위한 철광업은 많이 발달되었지만 금광업에 대하여는 소극적이었다.
조선 태조는 야금업을 크게 부흥시키고 태종은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나, 금 · 은 때문에 명나라와의 관계가 시끄럽게 되자 조선은 개국 초에 금 · 은의 채굴은 물론 금 · 은 장식품의 사용까지도 금하기에 이르러 금광업은 부진하였다. 따라서 15세기의 금광업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간의 금광업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15세기의 금광업은 조정에서 국용과 사대에 필요한 금을 얻기 위하여 농민들의 부역에 의한 관영형태로 운영되었으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금광업은 민간 자본가와 농민들이 영리와 생계를 위하여 영위한 것이다. 15세기에 조선정부는 국용과 사대를 목적으로 하는 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의 민간에 소장된 금을 거두어들이는 정책과 각지의 금광을 개발할 정책을 동시에 실행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금광개발정책을 위하여 채방사(採訪使)를 각처의 산금지(産金地)에 파견하고 현지 농민들을 징발하여 부역노동시킴으로써 시채작업(試採作業)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초부터 성종 말에 걸쳐 개발된 금광은 33개 읍에 달하였다. 당시의 금광은 대부분이 사금광이었고 그 가운데 연간 2백 냥의 금을 채납하던 함경도의 단천 · 영흥 · 안변 산금지와 강원도의 정선 · 회양 산금지가 가장 산출량이 많은 곳이었다.
1782년(정조 4)에는 평안도 성천 · 자산 사금광이 개발되면서 곧 청천강 남북의 사금광이 개발되었고, 18세기 말에는 함경도 · 황해도 · 경기도 · 강원도 · 전라도까지,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금광이 개발되었다. 1782년에서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하의 물주경영형태(物主經營形態)가 금광업에 적용되기 시작한 1806년(순조 6)까지 26년간은 호조 · 장용영(壯勇營) · 비변사(備邊司) · 군기시(軍器寺)에서 사금광을 설점수세(設店收稅)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금광이 호조의 소관하에 있었고, 호조가 계사(計士)를 파견하여 설점수세하였으므로 이 시기를 계사제(計士制) 하의 사금광업기라 할 수 있다. 계사제하의 금광업정책은 농민들의 사금광개발을 크게 억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금광에 투입된 농민들 곧 금군(金軍)으로부터 일정량의 세금을 받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계사제하의 호조와 영(營) · 읍(邑), 계사와 물주, 계사와 금군 간의 이해가 대립되어 관리 경영상 모순이 심화되는 한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금광의 잠채(潛採)가 만연되어 잠채광산에 대한 호조의 수세가 불가능하였으며, 금군의 갖가지 분쟁 · 불법행위를 제재할 조처가 없게 되자 이에 정부는 물주제에 의한 금군의 단속과 수세원(收稅源)의 확보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1806년에는 호조 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수령수세제하의 물주경영을 사금광에 적용하도록 제청하여 결정된 것이다. 물주자본에 의하여 금광산이 설치, 운영되던 수령수세제하의 설점수세제는 서울과 지방 상인으로 구성된 물주가 호조 또는 영 · 읍의 허가를 받아 금광채굴권을 확보한 뒤 금군을 모집하고 덕대(德大)를 선정하여 광산경영을 위임하였다. 덕대는 금광의 실질적인 경영자로서 물주의 자본으로 광산을 경영하였으며, 금군은 광산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여든 이농민(離農民)들이었다.
조선 말엽에는 우리 나라가 산금국으로서의 유망성을 보이자 선진열강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정부는 종래의 쇄국주의를 버리고 개국통상을 강조하게 되었다. 1864년 대원군이 집정하자 근대광업의 길을 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여러 외국인들에게 광산채굴권을 허용하여 금광산들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1906년에는 「 광업법」과 시행세칙, 그리고 「사광채취법(砂鑛採取法)」이 제정, 공포되어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광업제도가 탄생되었으며, 농상공부의 동의 없이 광업권의 매매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조선의 광업은 활기를 띠게 되어 대규모 금광업이 경영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진남포제련소 · 노량진선광소 등이 개설되었으며, 직산 사금지에는 드레저(dredger)에 의한 대규모의 사금채취가 시작되었다.
종전 후 광업은 다시 쇠퇴하여 휴광하는 광산이 속출하고 진남포제련소와 노량진선광소가 휴업하기에 이르렀으나, 1931년에는 금 개발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금의 해외수출을 통한 산금량이 증가되고 금값이 오르게 되자 산금장려정책(産金奬勵政策)을 써서 흥남제련소도 이때에 개설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지하자원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으며 1937년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의 공포, 1938년 「조선중요광물증산령(朝鮮重要鑛物增産令)」의 공포 등 금을 비롯한 모든 광업이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1936년 당시의 산금액(産金額)은 사금을 포함하여 모두 6872만7346원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광종별 산출액의 63% 정도를 차지할 정도여서 우리 나라 광업 제1위의 구실을 하였다. 그 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시광물의 개발을 중요시하여 금 개발은 쇠퇴하였고,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금광업에 대한 특별한 시책도 없이 점차 금광산의 설비물들이 파괴되어갔다.
1952년에는 우리 나라의 「광업법」이 새로이 제정되면서 「금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함께 공포하였는데 금의 생산과 매매를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자율화함으로써 금광개발에 자극을 주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1954년에는 「산금집중조성요령(産金集中助成要領)」이 실시되어 한국은행에서 산금매도 가격을 그램(g)당 1달러 12센트의 외환으로 계산해줌으로써 획기적인 특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1961년에는 단일환율제의 시행을 계기로 하여 그램당 1달러 12센트를 공정 환율로 계산하여 금시세의 70% 미만인 1,456환(圜)만을 주게 되어 한국은행의 산금집중배상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로써 금광개발은 다시 위축되었고, 1973년에 마침내 「금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폐지되었다. 오늘날에는 국제시세의 영향을 받아 다른 금속광산보다 금광산의 개발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성황은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개발중인 주요 금광산들은 금정(金井) · 금왕(金旺) · 전주일(全州一) · 상동(上東) 등이 있으나 국내 연간 금생산량은 2.5t 정도에 불과하고 그 가운데 2t은 동광석 제련 때 부산물로 얻어내고 있을 뿐이다.
금은 그 아름다운 색채와 희귀성, 그리고 불변성으로 인하여 문명의 발상과 역사를 함께 하였다고 일컬어질 만큼 일찍부터 사랑받아 왔다. 금은 곧 권력과 부귀의 상징으로, 신의 영광에 대한 표현으로, 또는 사후세계의 장식으로 각지에서 독특한 문화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일찍부터 금제의 유물이 알려져왔으며, 특히 삼국시대의 신라나 백제는 뛰어난 기법을 응용한 것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대체로 이들의 제작공정에 쓰여진 기술을 검토해 보면 첫째, 전연성(展延性)과 삭천성(削穿性)을 이용하여 단금(鍛金) · 조금(彫金)에 의한 제작이 가능하여 판금가공(板金加工) · 타출기법(打出技法) · 압출기법(押出技法) 및 갖가지 선조(線彫) 등이 망라되었다.
둘째, 가열용해성(加熱溶解性)으로 인하여 주조(鑄造)가 가능하다. 또 누금세공(鏤金細工)의 기법도 이러한 금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한 기술이다. 셋째, 합금에 이용하는 것이 쉬워 은이나 동에 섞으면 각기 독특한 색채를 내므로 금속공예에 쓰이며 도금이나 금박(金箔) · 금니(金泥) 등에도 응용한다. 금은 잘 늘어나고 얇은 금판(金板)으로 잘라낼 수가 있기 때문에 판금가공(板金加工)하고 원하는 대로 절단하여 이용할 수가 있다.
이러한 금을 이용하여 제작된 우리 나라의 고대유물들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대표적인 유물로서 신라나 백제의 유물에서 많이 보이는 금관(金冠) · 과대(銙帶)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얇게 늘인 금판을 갖가지 문양(文樣)대로 투각(透刻), 절단하여 형태를 가다듬고 장식을 한다. 투각에는 무늬 부분을 잘라내고 바탕을 남기는 문양투(文樣透)와 바탕 부분을 잘라내고 무늬를 남기는 지투(地透)의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삼국시대의 유물 중에는 지투의 계통이 더 많이 나타나서 금관 · 요패(腰佩), 불상의 광배(光背), 사리구(舍利具) 등에 보이며, 문양투는 요패의 일부와 식리(飾履), 향로의 뚜껑 등에 보인다. 이렇게 절단하여 만든 유물들은 다시 그 표면에 선조(線彫)를 가하거나, 또는 보요(步搖)나 다른 장식옥 등을 매달아 섬세하고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그릇[器皿]에 응용되는 단조(鍛造)의 기법이 많이 보여서 신라의 고분출토품 중 금제의 완(鋺) · 고배(高杯)가 상당량 보이고 있다. 또 타출기법은 뒷면에서 두드려 무늬를 도드라지게 하여 그 표면을 끌로써 마무리하는데, 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의 금제뒤꽂이는 그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타출기법과는 반대로 틀 위에 금판을 얹어 떠내는 압출기법은 불상 등의 제작에 많이 쓰인다. 그 밖에 사리함 등은 판금한 것으로 용기를 만들어 접합하거나 납으로 녹여 붙여 그 표면에 섬세한 갖가지의 조금기법을 구사한다.
한편, 길고 얇게 또는 가늘게 늘어나는 특성을 이용하여 상감재료(象嵌材料)로 쓰기도 하는데, 이 상감도 가느다란 금사(金絲)로 감입(嵌入)하는 경우의 선상감(線象嵌)과 조금 넓은 금판을 감입하는 평상감(平象嵌) 기법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상감기법의 다른 하나로 금아말감을 채우는 방법도 있다.
금은 가열하면 녹이기 쉬운 특성을 이용하여 불상 등의 주조나 누금세공용 금입자(鏤金細工用金粒子)를 만들 수도 있는데 우리 나라의 고대유물 가운데는 금제불상이나 누금세공한 각종 장신구가 있다. 또 아말감에 의한 도금이나 금박도금, 그리고 불경에 쓰이는 금니 등도 금으로 가능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금아말감은 수은에 금을 섞어서 동 또는 동합금의 제품에 바른 뒤 가열하여 수은이 증발하고 난 다음 금이 남아서 부착하게 하는 것인데, 고대로부터 널리 행하여졌으며 금동불의 대부분은 이러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도금이 좋은 점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실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은 증발시의 유해가스 때문에 후대에는 칠(漆)을 발라서 얇은 금박을 붙이는 이른바 칠박법(漆箔法)도 금 이용의 한 방편이었다.
금 가루를 아교에 개어 감지(紺紙)와 같은 종이에 쓰는 자경(字經)은 특히 많이 보이는 기법의 하나이다. 그 밖에 합금이 용이하여 동이나 은에 적당량을 넣어 독특한 석채를 내게 하는 금속공예에 응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금의 이용 역사도 길고 우리 나라에서는 그 출토유물도 풍부하여 많은 종류와 양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금에 대하여 고대문헌에도 적지않은 기사가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보면 유리명왕(瑠璃明王) 3년에 부분노(扶芬奴)에게 황금 30근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보장왕 4년에는 백제가 당나라 태종에게 금휴(金髹)의 개(鎧), 즉 금박의 갑옷을 보내어 당나라의 사관(士官)이 이것을 입고 종군하였는데 그 갑옷이 일광(日光)을 받아 눈부셨다는 기록이 고구려와 당군(唐軍)과의 전투를 설명하는 기사 속에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고이왕 38년에 금화(金花)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무왕 40년에는 금갑(金甲)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사가 보인다.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금과 관련되는 기록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11년에 민간에서 금은의 사용을 금하였다는 기사가 있고, 그 뒤에 복식(服飾)이나 거기(車騎) 등의 사용을 신분에 따라 제한한 것을 보면 그만큼 금의 사용이 널리 유행하였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진흥왕 35년에는 황룡사(皇龍寺)의 본존장륙불(本尊丈六佛) 주조 때 도금용으로 1만98푼[分]의 금을 썼다고 하였다. 문무왕 8년에는 능안(能晏)의 가야무(伽倻舞)를 보고 금잔으로 술을 주었다든지 경문왕 5년에는 당나라에서 금제 · 은제의 그릇을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사는 원성왕조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말은 중국 쪽에서 금은기가 신라로 왔다는 것을 뜻하는데, 당시 당나라에서는 금은기의 사용이 성행하던 시기였으며 이들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고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황금을 바쳤다는 기사는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신라에서 당나라로 금제의 불상을 비롯하여 공예품을 보냈다는 기사도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탑상조(塔像條) 사리에 관한 기사에서 사리함에는 순금제의 함을 썼다는 내용이 보이기도 하고 백률사조(柏栗寺條)에는 잃었던 금적(琴笛)을 찾아내자 왕이 상으로 금은기(金銀器) 등을 주어 보답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는 금에 대한 기사보다 유동(鍮銅)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 있으며, ‘선화봉사고려도경조(宣和奉使高麗圖經條)’에 ‘지소금은다동(地少金銀多銅)’이라 하여 금의 산출이 많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어서 이미 이때에는 금의 사용이 흔하지 못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며, 이는 『고려사』의 기록과도 부합이 되며 실제로 유물도 그리 많지가 않다. 다만 고려시대 금공기(金工器)의 명문(銘文) 가운데에 동종(銅鐘)을 금종(金鐘)이라 쓴 예가 많이 있어서 아마도 동종의 색깔에 따라 금종이라 지칭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정지원명삼존불상(鄭知遠銘三尊佛像)의 경우에도 조금상(造金像)이라 한 것을 보면 도금한 금공예품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우리 나라에 전하는 고대유물 중 이상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 이외에도 실제로 금제의 것은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고, 그 수량도 놀라울 만큼 많이 남아 있다.
장신구류―관(冠) · 관모(冠帽) · 과대 · 요패 · 귀걸이 · 목걸이 · 팔찌 · 반지 등, 불구류―불상 · 압출불(押出佛) · 사리구 · 경판(經板) 등, 생활용구―기명 · 침통(針筒) · 자물쇠 등, 장식금구―무기이기(武器利器)의 장식, 의복이나 목관(木棺)장식 금구 등이 있다. 출토유물에 따라 금제공예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에서 출토된 금제유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낙랑의 것으로 석암리(石巖里) 9호분에서의 교구(鉸具)를 들 수가 있다. 이 유물은 얇은 금판을 타출하여 7마리의 용을 표현한 뒤 크고 작은 금입자와 금사를 이용하여 이른바 누금세공의 기법으로 무늬를 넣고 비취옥(翡翠玉)을 감장(嵌裝)한 타출 · 누금세공 · 옥감장 등의 기술을 고루 구사한 화려한 것이다.
석암리 9호분은 낙랑의 유적이며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형식의 교구가 중국에서는 그다지 많이 보이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으로는 낙랑이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한 뒤 그 고지(故地)는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며 그 유민이 많이 남쪽으로 흘러와 공예사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친 사실을 상기한다면 매우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가 있다.
고구려의 고분은 일찍부터 도굴을 심하게 당하였고 고분의 형식이 석실형태(石室形態)여서 도굴이 용이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금제품은 귀걸이나 반지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귀걸이는 세환이식(細環耳飾)이 가야계(伽倻系)의 형식에 가깝고, 태환식(太環式)은 신라계의 형식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도금기술이 잘 남아 있어서 마구(馬具) · 관식(冠飾) · 식리(飾履) · 관장식 · 불상 등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백제의 금제품은 역시 무령왕릉 출토의 일괄유물에 다량으로 들어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관식 · 태환 · 세환이식을 비롯하여 뒤꽂이 · 목걸이 · 팔찌, 그리고 곡옥(曲玉)의 장식, 그 밖에 의복이나 목관에 쓰였으리라 짐작되는 장식금구 등이 있다. 백제의 유물 중 가장 오래되고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를 들 수가 있다. 이것은 철검(鐵劍)의 양면에 금상감의 명문이 있는 것으로 금의 이용뿐만 아니라 상감기법을 잘 말하여주는 것으로, 이는 4세기경으로 추정되어 상감기법의 발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식이나 장식금구 등은 금판을 투각하여 무늬를 나타내고 보요(步搖)를 매달기도 한다. 귀걸이는 정교한 누금세공기법을 응용한 것이 보이며, 뒤꽂이는 타출기법이 이용되었다. 곡옥을 감싼 금모장식(金帽裝飾)은 세선(細線)과 세립(細粒)으로 누금하고 있어 신라고분 출토품에 지지 않는 세련된 솜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팔찌 · 목걸이 등은 7 또는 9마디를 엮어서 만들어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형식으로 현대식 감각마저 풍기게 한다.
가야고분에서의 출토품은 최근에 와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목걸이 · 귀걸이 · 팔찌 · 반지 등에 금이 이용되고 있으며 관장식 등 뛰어난 도금솜씨도 보이고 있다. 가야의 금공예는 신라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단순하고 간결한 느낌을 갖게 하며, 고령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금관은 대륜(帶輪) 위에 4개의 입식(立飾)을 세웠는데 수목형(樹木形)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판금가공의 기법을 잘 구사하고 있다.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콜렉션(小倉Collection) 중의 금관도 대륜 위에 간략화된 화초형 또는 수목형의 입식을 세운 간결한 형식에 속한다.
금제의 유물이라면 신라고분의 출토품을 상기할 만큼 양과 질에서 모두 두드러져 그 종류 또한 풍부하다. 보관(寶冠) · 관식 · 태환 · 세환이식 · 과대 · 요패 · 팔찌 · 반지, 각종 장식금구, 그리고 기명, 작은 구슬과 방울 · 보검 · 금사(金絲) · 불교공예품 등이 있다. 이들은 주금(鑄金)에서 판금가공 · 선조(線彫) · 투조(透彫) 등 각종의 조금기법(彫金技法)이 구사되고 타출기법 누금세공, 그리고 도금에 이르기까지 금을 이용한 모든 금공기법이 고루 적용되고 있다. 이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그 형식과 기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보관과 관식:신라의 보관은 금관총(金冠塚) · 금령총(金鈴塚) · 서봉총(瑞鳳塚) 출토의 유물 이외에 근래에 와서 천마총(天馬塚) ·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에서 출토된 것 등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둥근 대륜(帶輪) 위에 출자형식(出字形式)의 입식과 사슴뿔형식의 입식을 세우는 것이 보통인데, 판금을 오려서 형태를 가다듬고 그 표면에 모조(毛彫)의 선각(線刻)과 영락(瓔珞) 구슬을 매단 모양이다. 이것은 신라의 고토(故土)에서만 발견되어 외형상 주류를 이룬다. 교동 출토의 예는 아주 작고 간결한 경우도 있다. 또, 새모양 · 나비모양의 관식을 비롯하여 정교하게 투조한 금모(金帽)가 있는데, 이들 역시 판금을 투조하여 표면에 수많은 영락을 달아 뛰어난 조금(彫金) 솜씨를 나타내고 있다.
② 과대와 요패:허리띠의 표면에 금제의 과판(銙板)을 붙이고 양끝에 교구(鉸具)를 단 것과 허리띠 아래로 여러 가닥의 요패를 늘어뜨리는데, 역시 판금을 절단하여 형태를 구성하고 투조로 무늬를 나타낸다. 요패의 맨 아래 끝에는 도자(刀子) · 물고기 · 침 · 침통 · 쪽집게 · 숫돌 · 향주머니 들을 매단다. 천마총 출토의 요패에는 타출기법도 보이며, 특히 과대의 과판에는 지판(地板)을 두고 무늬를 투각하는 이른 바 문양투(文樣透)의 기법을 쓰고 있다.
③ 귀걸이:신라의 귀걸이는 신라 금제품의 대표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라 할 수가 있다. 대체로 태환식과 세환식의 두 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특히 태환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 출토의 예를 들 수 있다. 굵은 환(環)의 표면에 누금세공의 기법으로 귀갑형(龜甲形) 구획을 긋고 그 안에 다시 같은 기법으로 꽃무늬를 장식하고 중간식(中間飾)이나 끝장식에도 화려한 누금세공의 무늬를 넣은 뛰어난 유물이다. 장식없는 태환에 간결한 작은 수식을 매단 형식도 있으며, 세환식의 경우는 가느다란 환 아래 중간식과 끝장식이 연결되는데 이 늘어뜨린 장식의 형태가 너무도 다양하여 화려하고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④ 팔찌와 반지:팔찌는 간단한 금관(金管)이나 금봉(金棒)을 구부려 만든 것과 금봉(金棒)을 구부려 그 표면에 톱니모양의 장식을 가한 것, 다시 구슬을 감장(嵌裝)한 것 등이 있다. 또, 금판을 구부려 만든 다음 표면에 누금세공의 기법으로 무늬를 넣은 경우도 보인다. 황남대총 출토품의 경우는 금봉을 구부린 형식인데, 피장자의 오른쪽팔과 왼쪽팔에 각기 5개씩 모두 10개를 낀 채 출토되었다. 반지는 둥근 고리의 간단한 것이나 가끔 누금세공한 사이에 구슬을 감장한 것도 있다.
⑤ 목걸이:여러 색깔의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중간에 금제의 장식금구로 연결하고 가슴걸이처럼 길게 늘인 형식에서 비롯하여 황남대총 남분(南墳)의 경우는 금실로 엮어서 만든 금줄에 금제의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리게 만들기도 하였다. 또, 경주 노서동고분에서 출토된 금제투환옥(金製透丸玉) 목걸이는 금제의 작은 바퀴들을 여러 개 합쳐서 동그란 투환을 만들고 거기에 하트형의 보요를 붙인 투환옥을 이어서 목걸이를 만들고 중심에 파랑색 곡옥 1개를 매단 형식인데, 출토상태에 비추어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인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신라의 목걸이는 길게 늘인 형식이 많다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금색과 파랑색 옥의 색조를 격조높게 조화시키고 있다.
⑥ 용기와 사리장엄구(舍利壯嚴具):금제의 용기는 주조(鑄造)의 기법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금관총출토의 금제완(金製鋺)이나 서봉총출토의 예는 두드러져 기형(器形)을 다듬고 구연부(口緣部)를 말아 끝맺음 하며 황남대총 출토의 경우는 고배형식(高坯形式)인데 구연부에 심엽형 영락(心葉形瓔珞)을 금사로 꿰어 매달고 있다. 그 밖에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용기(舍利容器), 익산 왕궁리 오층탑의 사리용기 등도 역시 금제의 것이었다. 이들은 판금으로 사각의 합(盒)을 만들어 표면에는 선각(線刻)한 무늬를 넣고 사이사이를 어자문(魚子文)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왕궁리의 금강경판(金剛經板)은 특히 유명하다.
⑦ 금불과 도금불:금제의 불상은 그다지 예가 많지 않으나 구황리에서 나온 금제의 여래좌상과 입상(立像) 2구는 황복사(皇福寺)의 사리장엄구 속에 함께 있었으므로 정교하게 투각한 광배(光背)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도금한 이른바 금동불은 모두 뛰어난 솜씨가 전해져 지금도 금색이 찬란한 유물을 많이 볼 수 있다.
신라의 금제품에 비하면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러 금제는 급격히 줄어든다. 따라서 금이 지니는 희귀성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대체로 각종의 장신구 · 호신불 · 사리장엄구 등의 불교공예품에 나타나지만 이미 이때에는 신라에서와 같은 다양성이 없어진다. 따라서 금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이 강열해지는 대신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금을 멀리하려는 성향까지 띠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