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자아 실현과 연관된 인간 고유의 보편 활동이다. 노동 개념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의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서 노동 개념은 그 자체보다는 자연이나 환경, 휴식이나 게으름, 유희, 혹은 기술이나 자본과 같은 대립 개념을 통해 이해된다. 노동 자체는 다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생산 노동과 비생산 노동, 혹은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 등으로 나눠진다. 수고와 근면으로서의 전통 노동 개념을 지양하고 대안의 노동 개념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역사에서 꾸준히 지속되어 오고 있다.
노동에 대한 정의는 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쉽지 않다. 노동은 인간이 수행하는 보편의 활동으로서, 일반의 상식 차원에서 이해된다는 점에서 당연시되기 쉽다. 노동의 정의가 갖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일정한 공동의 정의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것은 노동이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라는 점이다. 동물의 활동은 자유와 이성에 근거를 두지 않고 본능을 따른다. 또한 노동은 환경과 대조되는 바로서 인간 집단의 사회성을 드러내며, 사회관계를 직접 수반한다. 자연이나 환경에 대한 적응과 대결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유한 집단 활동으로서 노동은 자아 정체성의 형성과 자아실현에 도움이 되는 주요 수단이다. 이와 아울러 노동은 사회에서 필요하고 존경받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당위’의 요소를 지닌다. 즉 노동은 수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열의와 헌신을 가지고 잘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당위로서 노동은 서구 기독교와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윤리와 규범의 형태로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과정을 거쳐, 근대로 들어오면서 도덕과 의식의 형태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밟아 왔다. 나아가서 노동의 수행에는 일정한 감정의 문제가 개입한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이나 좌절 또는 흥분, 따분함 또한 느낀다. 노동은 그 수행자에게 만족을 주는 활동이다. 노동은 성취 그 자체보다도 성취의 느낌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그 목적이나 효용에 대한 논의를 포함한다. 그것은 사회 권력의 기반을 이루고 경제와 복지를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은 자존감 및 행복, 사회 진보와 삶의 질,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한 여가와 아울러 성숙과 자기 규율 및 도덕 가치들과 연관된다.
노동 개념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시간, 공간, 사회의 차원이 그것이다. 시간의 차원에서 보면 역사에서 노동 개념에 대한 시간의 작용은 일률이나 균일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개념 일반이 그러하듯이 노동 개념에서 변화의 흔적이 보존되고 반영되는 정도는 현재와의 거리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고대에서 현재로 내려올수록 보다 풍부한 정보를 남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일반론에도 불구하고 노동 개념은 근대에 들어와 경험한 변화의 양상을 추적하는 데 집중해 왔다. 노동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노동 개념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을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 개념은 근대의 노동 현장에서 항상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점점 의식으로 고양되면서 다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밟는다.
역사의 국면에서 노동 개념을 둘러싼 의미의 이행은 공간의 차원에서 이 개념을 둘러싼 의미의 변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공간의 문제는 흔히 보편성과 특수성의 차원에서 이해되어 왔으며, 최근 서구 중심주의의 자명성이 의문시되고 이에 대한 비판과 대안들이 출현하면서 서구의 보편주의를 동양의 보편주의의 문제로 치환하고자 하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서양과 동양을 아우른 보편주의의 일정한 형태를 상정하고, 동서양이나 각 국가 및 지역들에서 발현하는 특수한 양상들을 규명하고자 하는 문제의식도 대두하고 있다.
서구 노동 개념은 동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이중성과 근대의 의미 내용을 발전시켜 왔다. 고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이래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관조의 삶(vita contemplativa)’은 노동을 포함하는 바로서의 ‘활동의 삶(vita activa)’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종교 개혁기에 노동이 삶의 주요 목적이며 궁극에서 인류를 구원한다는 생각에서 ‘활동의 삶’에 우선권을 부여한 칼뱅(Jean Calvin)이 출현하기까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근대 노동 개념의 단초를 이루는 이러한 생각은 인간에 대한 자연 및 환경이라는 대립 구도를 전제로 자연의 가공을 통하여 인간에 유용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서구의 전통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노동 개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나 근대 이후 자본주의 생산에서 전형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동 개념은 시공간과 아울러 사회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 개념의 대부분은 사회의 특정한 범주나 계급에 의해 생산되어 왔다. 대략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노동 개념은 노동의 당사자인 일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지배 계급이나 지식인에 의해 주로 형성되어 왔다. 근대 이전의 노동 개념이 지니는 이러한 편향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노동 개념은 노동을 직접 수행하는 주체로서 사회의 하류 계급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노동의 바깥에서 그것을 형상화해 온 지배 계급이나 지식인의 양자가 뚜렷한 대조를 보여 왔다. 노동 개념의 계급 기원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노동하는 사람 대부분은 역사에서 아무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하는 천한 존재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교양인이나 엘리트, 지식인들이 노동과 노동 개념의 형상화를 주도하면서 그와 관련된 이론을 생산해 온 것과 달리, 노동의 주체로서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노동과 그 산물을 통해서 그 흔적을 남겨 왔다.
여기에서 노동 활동을 둘러싼 이중성 내지는 두 유형의 사유가 등장한다. 첫 번째로 지배 계급과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경멸해 왔다. 다소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들에게 좋은 삶이란 노동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여가의 생활이었다. 두 번째로 역사를 가지지 못하여 배우지도 못하고 따라서 기록을 남기지도 못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존감과 자부심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하고자 했던 사실은 역사를 통한 노동의 산물과 그 흔적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랜 역사에 걸쳐 일하는 사람들은 그 개념화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 결과물을 우리에게 남겨 왔다.
노동 개념은 그 자체보다는 그와 대립하는 반개념들과의 비교를 통해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 노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무엇이 노동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노동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실체들이 대비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자연이나 환경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이나 게으름, 유희, 혹은 기술이나 자본 등의 개념과 대비되는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널리 알려진 독일의 개념사 사전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노동이 아니라 시민에 ‘걸맞은 활동(angemessene Tätigkeit)’이었다. 노동은 먼저 시민 도덕이나 교양과는 다른 활동으로 여겨졌고, 시민에게 적절한 활동의 목적이자 목표로 설정된 ‘여유(Muße)’와도 대립되었다. 고대 기독교 시기에 노동은 휴식이나 게으름과 대조를 이루었다. 성경에서 바울의 훈계가 보이듯이 노동과 게으름(otiositas)의 대립 쌍은 이후 계속되는 전승의 과정을 밟아 왔다. 노동과 여가 혹은 게으름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소멸했다. 이를 대신하여 노동과 ‘놀이(Spiel)’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등장했다.
노동과 게으름의 대립이 근대에 들어와 소멸한다는 지적은 상대적으로 노동과 놀이의 새로운 대립을 강조하기 위한 진술이지만, 노동과 게으름, 다른 말로 하자면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사이의 대립은 역사에서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에 또 가장 오랜 시기에 걸쳐 지속되어 왔다. 노동에 대한 기피는 노동 그 자체와 비슷하게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동방 문명에서 노동은 대개 저주로 여겨져 왔고 어떠한 미덕으로도 찬미되지 않았다. 고대 문명에서 노동은 타락한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저주이자, 노예들의 영역이거나 혹은 타락이나 부채에 대한 처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 윤리는 없으며, 단지 강압의 형식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기독교 문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세기」에서 보듯이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생존을 위한 노동의 필요는 본원의 저주이자 원죄에 대한 처벌이다. 게으름과 나태를 경계하는 몇몇 경구들이 구약에 있지만, 이 경우에도 노동은 우선 좌절과 번거로움, 필요, 기껏해야 의무이다. 노동은 결코 자신의 가치나 자기애를 도모한다거나 순수한 만족의 근원이 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 노동 윤리의 확립을 배경으로 ‘노동의 신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했다고는 하더라도 일과 게으름,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과 대조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 등장한 노동의 대립 개념으로는 여가나 기술을 들 수 있다. 노동과 여가의 이분법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점차 자본주의 상품화의 시장에 휩쓸려 왔다.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은 임금 제도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구분되기 시작한다. 노동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여가가 그러하듯이 기술 또한 근대에 들어오면서 노동에 대한 유의미한 대립 쌍으로 등장하였다. 근대 임금 제도의 출현이 여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과학 지식과 공학 기술에 의한 전문화의 발전은 노동과 기술을 대립시켜 판단하는 견해를 나타나게 하였다.
노동 개념의 구분과 대조는 노동 개념 자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form)과 질료(materie)에 각각 대응하여 이해한 실천(praxis)과 제작(poiesis)으로서의 노동, 혹은 ‘관조의 삶’과 ‘활동의 삶’ 같은 이중의 의미 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고전 의미와 더불어 근대에 들어오면서 노동의 성격과 그에 대한 개념 자체가 변화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근대에 들어와 생산 노동과 비생산 노동이 먼저 구분되었으며, 이후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이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아마도 노동 개념의 이중성은 ‘노동’이라는 말 자체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고대와 근대의 모든 유럽어는 어원으로는 관계가 없지만 동일한 활동으로 생각하는 두 용례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 구분은 지속해서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는 ponein과 ergazesthai를, 라틴어에서는 laborare와 facere, 혹은 동일한 어원을 갖는 fabricari를, 프랑스어에서는 travailler와 ouvrer를, 독일어에서는 arbeiten과 werken을 구분한다. 이 모든 사례에서 ‘labor’에 상응하는 단어들만이 명백하게 고통과 번뇌를 의미한다. 독일어의 Arbeit는 원래는 농노들의 농장 노동에만 적용되었고, 장인의 노동은 따로 Werk로 불렸다. 프랑스어의 travailler는 이전의 labourer를 대체했는데, 이 말은 고문의 일종을 의미하는 tripalium에서 파생되었다. 라틴어에서 노동은 늦어도 기원전 1세기부터 πόνος (pónos: pain) 뿐만 아니라 ἐνέργεια (energeia: activity, operation)에 상응하는 이중의 의미로 나타난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남성의 덕목과 결합된 노동(labor)을 고통이나 번뇌를 의미하는 돌로(dolor)와 구분했으며, 그리스의 헤시오드(Hesiod)는 labor(ponos)와 work(ergon)를 구분했다. 노동 개념의 이러한 이중성은 독일의 개념사에서도 지적되었다. 그에 따르면 ‘노동’은 ‘수고’라는 의미에서부터 ‘작품’, ‘스스로 노력하다’, ‘작업하다’, ‘창조하다’에 이르는 두 가지 내지는 다의의 의미를 포함하여 왔다.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문제의 지형은 여전히 복합적이고 또 징후적이다. 사회 합의의 틀에서 노동의 협동 측면을 강조하는 설명과 착취의 측면에서 보는 흐름으로 구분하는가 하면, 아담 스미스(Adam Smith) 이후의 생산성과 경제 효율성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계급과 정치 운동을 대비하기도 한다. 전자의 효율과 생산성은 20세기 중반에 고전 경제학의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폴라니(Karl Polanyi)의 비판을 통해 논의된 바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노동 개념의 주요한 제창자들인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나 아렌트, 그리고 교황 바오로 2세에서 일정한 형태로 찾아볼 수 있다. 계급과 정치로서의 노동은 1960~70년대에 이르기까지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블록, 그리고 제3세계에서 지속하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왔다. 서구에서 구좌파의 영향력 쇠퇴와 신좌파의 새로운 정향, 동구권의 몰락과 소비에트 체제의 해체, 세계 차원에서 지구화와 신자유주의의 파급을 배경으로 노동은 기존의 의미로는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와 쟁점들을 제기하면서 점차 분화하여 다양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은 정규의 지불 고용에 특화하고 있다. 노동의 성별 분업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와 자녀 양육을 무시하거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역사의 가장 기본 아이러니에 속한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임금 노동은 사회에서 수행되는 모든 노동, 특히 그것이 없다면 사회가 기능할 수 없는 가사 노동과 자원 노동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지불 노동뿐만 아니라 무급의 가사나 돌봄 노동, 그리고 자원 활동까지를 포함하여 노동 개념을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어 왔다.
20세기 노동에서 여가, 혹은 휴식의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상 사회주의자들의 여가관과 여가 및 휴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로 다른 의견에서 보듯이, 여가의 정의와 내용에 대해서는 오늘날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노동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노예를 배제한 시민에 한정된 이상이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급속도로 진전된 산업과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이러한 이상은 일반 대중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전반기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여가 사회’의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은 종식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전쟁 기억의 소멸과 급속하게 증대한 풍요를 배경으로 노동 시간의 축소와 휴일 요구의 증대는 ‘여가 사회’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야기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오일 쇼크와 불경기는 노동 윤리에 관한 논의의 증대와 함께 ‘일중독(workaholic)’이라는 신조어의 출현을 낳았다. 1990년대에 들어와 시간 짜내기(time squeeze)와 비자발적 여가, 노동과 소비의 악순환이 논의되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과로 현상이 일상이 되었다.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는 노동 ‘유연성’의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1980년대 이후 이른바 지구화의 진전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배경으로 자본에 이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노동의 이동과 아울러 국가 차원에서 노동의 유연성이 중심 주제로 자리 잡으면서 지구 차원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바우만(Zygmunt Bauman)은 무거운 근대성의 시대라는 시간의 지평은 긴 것이었으며, 노동자들에게 그 지평은 회사 안에서 종신 고용이라는 전망으로 그려졌지만, ‘장기적’ 심성을 대체하고 들어선 새로운 ‘단기적’ 심성을 배경으로 노동의 ‘유연성’이 구호로 된 오늘날 노동의 생애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한다. 새로이 출현한 이러한 불확실성은 한 사람의 생계와 미래의 전망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끔찍한 재앙을 담고 있다. 비정규의 임시 노동이 포화 상태를 이룬 오늘날의 현실에 만연한 노동 착취와 노동 ‘유연성’의 과도한 진전은 파견 근무나 기간제 근로,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듯이 노동의 어떠한 이상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치닫고 있다.
가차 없는 현실의 가혹함에 비례하여 고통스럽고 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에 대한 대안은 상상력의 지평 너머에서 아련하게 사라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와 근면으로서의 전통 노동 개념을 지양하고 대안의 노동 개념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의미 있는 형태로 지속해 오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의 비판 사회학자인 밀스(C. Wright Mills)는 장인 노동(craft work)을 즐거움과 효용(use)이라는 두 가지 특성으로 제시하면서, 노동과 놀이(play) 사이의 분리를 경험하지 않고 일하면서 동시에 노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는 노동과 권위에 대한 거부(refusal of labor), 즉 사실상의 자발적 예속에 대한 거부가 해방 정치의 시작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따라 일상의 노동은 단순한 생존이나 경력이 지배하는 실체라기보다는 노동하는 개개인의 꿈과 비전을 실현하는 가능성의 영역이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