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수고와 노고로서의 인간 활동을 의미하는 노동 또는 근로이다. 일은 인간의 보편 활동이지만 그 의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해 왔다. 일이란 용어는 근대로 이행하면서 변화를 겪는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분하여 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는 천한 것으로 간주한 전통 시대의 일과 연관된 용어로는 근로나 역역(力役), 고역(雇役) 등이 있다. 한국의 근대 일 개념은 근면주의가 주류를 이루어 왔지만, 이상주의는 경제 지상주의와 생산 물신주의가 압도해 온 근대의 주류 일 개념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비전을 제공한다.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아득한 역사를 지닌다는 점에서 수고와 노고로서의 인간 활동을 일컫는 일의 개념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전통 사회에서도 오랫동안 쓰여 왔다. 이는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일의 개념에 해당하는 노동(勞動)이라는 말은 『장자(莊子)』와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문헌에서 일에 해당하는 개념 그 자체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의 개념을 검토해 보면, 한국에서 이 말의 용례는 14세기 중엽 고려 말기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의 시문집인 『익재난고(益齋亂藁)』(卷第九 下 史贊의 成王條, 1363)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5세기 중엽에 간행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타난다. 이는 3세기의 『위지(魏志)』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보다는 늦은 것이지만 근대 초기에서 시작하는 일본의 경우보다는 오래된 것이다. 전통 시대의 문헌들에서 ‘노동’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서의 '땀 흘려 일하다, 수고로이 일하다'라는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문헌에서 같은 내용인 ‘노동(勞動)’의 의미를 보면 '수고로이 일하다'라는 뜻 이외에도 15세기 말 이후에는 ‘노심초사하다’, '피로하다(혹은 피곤할 정도로 신경을 쓰다)', ‘힘들게(애써서) 거둥하다’, 혹은 '힘쓰고 움직이다'와 같이 쓰인다. 이는 하층 노동자가 아닌 왕이나 왕족, 혹은 사족과 같은 지배층의 정신노동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하층민의 육체노동을 대상으로 하는 1400년 초의 사례들과는 구분된다.
어느 경우이건 인간에 대한 자연의 대립 구도를 전제로 자연의 가공을 통하여 인간에 유용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서구에서의 일 개념은 찾기 어렵고, 이는 동양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연과 인간을 한 몸으로 보는 의식에서 일을 이해하는 이러한 사고는 일을 통한 창조로서의 의미가 강한 서양과는 대조를 이룬다. 지역 변이에서 동서양의 일 사상이 지니는 공통점과 차이점에서 나아가 동양권 내부에서도 각각의 국가와 하위 지역들의 편차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근대 이행기에 발생한 유사한 현상들을 동아시아 삼국이 각각 달리 표현해 온 사실에서 보듯이 ‘일’에 대한 동아시아 삼국의 의미 내용과 개념의 변천 역시 각각의 역사 과정이 달랐던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전통 시대 일의 이러한 쓰임은 근대로 이행하면서 변화를 겪는다. 일의 개념에서 지배층의 정신노동을 지칭하는 내용은 없어지고, '땀 흘려 일하다, 수고로이 일하다'는 육체노동에 대한 전형의 의미는 그대로 남는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일 또는 노동이라는 말은 근대에 들어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labor’나 ‘work’의 번역어로 이 개념은 18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채용되어 이후 조선과 중국으로 보급되었다. 1895년 학부 편집국에서 펴낸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에 처음으로 그 용례가 나타나는데, 1900년대에 들어와 『대한매일신보』나 『노동야학독본』 등의 신문이나 교과서류에서 산발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다가 1910년대에 들어와 점차 통용되기 시작했다.
전통 시대 일의 변천 과정에서 조선 왕조에 초점을 맞춰 보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유교를 채택한 이 시기의 노동관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도덕과 물질의 양자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의 육체노동이나 물질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천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통 유교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7세기 이래의 실학 사상은 유교 노동관에 입각한 이러한 정형화에 일정한 균열과 비판을 가져왔다. 그러나 실학사상은 유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유형원(柳馨遠)은 정신노동을 하는 지배층이 육체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을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대부 도덕의 우월성을 옹호했으며, 일하는 인간을 강조한 정약용(丁若鏞)은 신분에 따른 분업을 전제로 선비가 지닌 전문 지식의 가치를 육체노동의 우위에 두었다. 실학사상에서 노동에 관한 가장 진전된 인식은 북학파로 알려진 박지원(朴趾源)이 대표한다. 사회의 최하층에서 살았던 농민들의 해방을 통해 이상 사회를 만들 것을 기대한 박지원은 일에 매우 높은 도덕과 미의 평가를 부여하였다. 그에게 일은 물질 수요에 따른 활동일 뿐 아니라 윤리 도덕, 아름다움과 생명의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었다. 이용후생의 제창자답게 박지원은 자신의 일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곧 덕이라고 하였으며, 일을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전통 시대에 일 개념과 연관된 용어로는 근로나 역역(力役), 고역(雇役) 등이 있다. 전통 시대 국가에 대한 의무로서 이 개념에 연상되는 의미 내용으로 인하여 이들 용어는 근대로 들어오면서 거의 사라졌다. ‘근로(勤勞)’의 용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고려사』와 『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전통 시대에는 노동과 비교해 근로라는 개념이 이른 시기부터 두루 사용되었다. 근로라는 개념은 임금의 역할 수행이나 유생들의 면학 공부, 혹은 조정에서 신하들의 활동 등을 주로 의미한다는 점에서 노동과는 달리 땀 흘려 일한다는 육체노동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노동이 왕을 포함한 상층 지배층의 수고나 노력을 지칭한다는 점에서는 근로 개념의 외연과 중복되면서도, 동시에 하층 백성의 고된 육체노동을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근로와 구별된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근로’라는 말은 때로는 ‘노동’보다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노동’ 개념과 경합 관계를 보인다. 일을 대표하는 두 개념으로서 근로와 노동은 각기 살아남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사회 분위기와 맥락에서 통용된다. 많은 경우 ‘근로’라는 말은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이며 때로는 국가 기구나 공식 제도와의 연관에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노동’은 흔히 이념적이고 진보적이거나 사회 운동의 맥락에서 사용되면서 보수 집단이나 체제에서는 회피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점에서 ‘근로’라는 말이 운동이라는 용어와 결합하는 것은 매우 드물고 또 어색하지만, ‘노동’은 '운동'고ㅑㅏ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사회 운동이나 진보를 함축하는 일정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근대로의 이행 이후 한국은 크나큰 변화의 물결을 지속해서 경험했다. 이를 배경으로 일 개념 역시 유의미한 변화를 겪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경험, 해방과 분단, 전쟁과 쿠데타, 경제 발전과 민주화, 지구화의 공세와 금융 위기 및 최근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짧은 시기에 급격한 변화를 경험해 왔다. ‘일’의 개념은 이러한 과정의 주요 국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의 계기를 맞았으며, 동시에 그 자체가 변화를 선도하는 상호 작용을 경험해 왔다.
한국 근대의 일 개념은 두 가지의 연원에 의해 형성되었다. 하나는 전통의 계승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 및 일본의 영향이다. 전통과 관련해서 보자면 전통 시대의 일 개념은 지배층의 정신노동과 아울러 '땀 흘려 일하다, 수고로이 일하다'는 육체노동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녔다.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전자의 의미는 탈락하고 후자의 의미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 근대의 일 개념이 노역과 수고로서의 부정의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서구로부터의 근대 일 개념 또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를 배경으로 한국 근대에서 일은 근면주의와 이상주의라는 두 범주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근면주의의 요소는 전통으로부터 이행한 결과를 일부 반영하지만, 전통 그대로의 계승은 아니었다. 대체로 한국의 근대가 그러하듯이 근면주의 역시 서구로부터의 영향을 배경으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서구와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일을 점차 일반적인 사회 활동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잡음에 따라 일에 대한 추상의 인식이 생겨났다.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일 개념은 생산과 관련된 경제 부문에서 가장 정형화된 양식으로 나타났다. 근대 자본주의 생산 요소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일에 대한 추상화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으로부터 아담 스미스(Adam Smith)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마르크스에서 레닌으로 이어지는 계급주의와 사회주의에 의해서도 공동으로 지지받았다. 이데올로기의 상이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이성과 진보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바탕으로 사회적 삶의 근원으로서의 생산을 칭송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식으로 변용된 한국의 근면주의에는 생산에 대한 강조가 중심에 있다. 서구에서와 비슷하게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유주의에서는 흔히 노동 윤리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 규율의 논리를 정교화했다. 하지만 서구에서의 일이 그에 대한 일정한 존경과 찬미를 수반한 것과 달리 한국은 당위와 의무로서 일방적으로 부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근대 일 사상의 일정한 변용태는 수고와 고통으로서의 전통 일 개념과 상대적 친화력을 지녔으며, 이는 특히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러했다.
두 번째 요소로서 이상주의는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일 자체에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일의 신성이나 일 지상주의, 일중독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근대의 일은 일 자체로서의 일, 일을 위한 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지상 가치이자 이상이 되었다. 일에 내재하는 가치와 아울러 일하는 사람의 인격에 주목하는 이러한 일을 근면주의와 구분하여 이상주의로 부를 수 있다. 근면주의가 이념에 따른 두 범주로 다시 구분되듯이 이상주의 내부에도 다양한 편차와 의견의 상위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산업이나 민족, 국가, 혹은 계급에 대한 헌신이나 봉사를 강조하는 근면주의와는 달리 이상주의에서는 추상의 의미에서 공공이나 인류, 혹은 자연에 대한 지향과 몰입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 일 개념의 두 주제로서 근면주의와 이상주의의 두 요소는 1908년에 유길준(兪吉濬)이 펴낸 『 노동야학독본』을 비롯한 애국 계몽기의 논설들에서 시작해서 최근에 이르고 있지만, 어느 시기에나 이 두 요소가 동일한 양상으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각각의 시기에 주요한 역사의 사건과 국면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끊임없이 변용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 일 개념은 근면주의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 사상에서 비롯되어 한말의 근대 계몽주의자들과 1910년대 이후 민족, 자유주의 계열을 거쳐 해방 이후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일의 자유와 해방을 표방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식민주의와 자본에 대한 대결과 투쟁에 역량 대부분을 소진함으로써 정작 주가 되는 일 자체에 대한 사유를 충분히 숙성하는 장을 확보하지 못했다. 사상의 외래 도입과 그것의 기계적 적용이라는 다소 도식화되고 반사적인 대응이 되풀이되어 왔다.
근면주의 내부에는 다양한 편차가 있었다. 인간주의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강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의 경향이 있는가 하면 노무 관리로서 순전한 자본의 입장을 반영하는 고역과 착취의 접근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일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을 반영하는 것으로, 근면주의의 원리는 일의 효율과 생산성에 우선하는 강조점을 둔다. 능률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일에 대한 인식의 한계는 자명하다. 그것은 국가의 부나 경제 성장, 혹은 체제의 건설, 유지를 지상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일의 역량이나 자율의 문제는 부수되거나 고려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이상주의는 노동에 대한 자의식과 아울러 노동자의 인격과 인권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근면주의와 구분된다. 나아가서 이를 바탕으로 사회나 인류와 같은 일반화된 장에 노동의 목표를 설정하고자 한다. 이상주의는 노동의 역량과 의미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것을 보편의 지평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갖는 추상성과 관념성의 한계에도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