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난고』는 고려 후기의 학자, 이제현의 시, 서, 비명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익재난고』는 권1∼4에 시, 권5에 서(序), 권6에 서(書)와 비, 권7에는 비명, 권8에는 표가 실려 있다. 권9의 상에는 세가, 하에는 사찬과 서(序), 책문, 논, 송이 있고, 권10에는 장단구, 무산일단운이 실려 있다. 『익재난고』는 이제현의 아들 창로와 손자 보림이 편집하여 1363년(공민왕 12)에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이때에 이미 없어진 원고가 많아서 책 이름을 ‘난고’라고 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원주에서 『역옹패설』 등과 함께 『익재집』으로 중간하였다.
10권 4책. 목판본.
『익재난고』는 이제현의 아들 창로(彰路)와 손자 보림(寶林)이 편집하여 1363년(공민왕 12)에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이때에 이미 없어진 원고가 많아서 책 이름을 ‘난고’라고 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원주에서 『역옹패설』 등과 함께 『익재집』으로 중간하였다.
1600년(선조 33)에 그의 11대손 시발(時發)이 경주에서 간행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경주에서 허경(許熲)이 다시 중간하였다. 1814년(순조 14)에 경주에 살던 후손들이 다시 중간하였다.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파한집』 · 『보한집』 등과 함께 합본으로 간행하였다.
1973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에서 1814년 간행본을 대본으로 하여 『서하집(西河集)』 · 『매호유고(梅湖遺稿)』 등과 함께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으로 영인하고 간행하였다. 197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을 대본으로 하여 원문을 영인하여 수록하고 번역문과 함께 합본하여 국역총서로 간행하였다.
『익재난고』는 권1∼4에 시, 권5에 서(序), 권6에 서(書)와 비, 권7에는 비명, 권8에는 표(表), 권9는 상 · 하로 나누어 상에는 세가(世家), 하에는 사찬(史贊)과 서(序) · 책문(策問) · 논 · 송(頌), 권10에는 장단구(長短句) ·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이 실려 있다.
최근에 나온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 『익재난고』는 이색(李穡)의 「익재선생난고서(益齋先生亂藁序)」와 임상원(任相元)의 「익재집중간서(益齋集重刊序)」가 권두에 실려 있다.
그리고 유성룡(柳成龍)의 「익재선생문집발(益齋先生文集跋)」과 이시발의 지(識), 김빈(金鑌)의 발, 허경의 「익재선생문집중간지(益齋先生文集重刊識)」, 김노응(金魯應)의 「익재선생연보후서(益齋先生年譜後敍)」, 이규석(李圭錫)의 「익재선생문집중간지」가 권말에 수록되어 있다.
『익재난고』에 수록된 글을 통하여 이제현이 중국에 건너가서 그 곳 문사들과 교유한 자취를 알 수 있다. 『고려사』에서 빠져 있는 여러 가지 사료를 보충할 수 있다. 『익재난고』 권1에서 권4에 실린 시를 통하여 그의 시인으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볼 수 있다.
그 중 권3의 「산중설야(山中雪夜)」는 그의 평생의 시법이 모두 들어 있다고 일컬어진다. 김택영(金澤榮)은 그의 시를 평하여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을 구비하여 우리나라 한시사상 제일의 대가”라 평하였다. 이덕무(李德懋)도 우리나라 2,000년 이래의 명가로 추앙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에서는 “그는 사에도 능하여 자자구구가 음률에 맞았다.”고 평하였다. 『익재난고』 권4에 수록되어 있는 소악부(小樂府)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우리말 가요를 악부체로 번역한 것으로 11수가 있다.
그 중에서 구비전승되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 문자로 기록되고 정착되었다. 현재 가사를 전하는 고려가요와 부합되는 것으로 「처용가」 · 「서경별곡(西京別曲)」 · 「정과정곡(鄭瓜亭曲)」이 있다. 그러나 한 노래의 전편을 직역한 것이 아니고 본래 가요가 지닌 정서를 살려 의역한 것이다.
「처용가」의 경우는 신라의 향가(鄕歌) 및 『고려사』 고려속악(高麗俗樂) 「처용가」의 일부와 배경설화를 참작하여 의역하였다. 『익재난고』 소악부의 「장암가(長巖歌)」 · 「거사련(居士戀)」 · 「제위보(濟危寶)」 · 「사리화(沙里花)」 · 「소년행(少年行)」 · 「오관산(五冠山)」은 원가의 가사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악부를 통하여 원가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9수의 소악부에 이어서 악부시 2편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사주(社主)와 기녀와의 사랑을 읊었다. 또 하나는 가난한 탐라섬(耽羅島, 탐라도) 사람들의 불평을 풍자적으로 표현하였다.
『익재난고』 권10의 장단구는 이제현의 사문학(詞文學)의 면모를 과시한 것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제현의 사(詞)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다. 사는 그 이후에도 더러 나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가 단연 독보였다고 할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지내면서 그 곳의 음률과 사곡(詞曲)을 익혔다. 또한 사에 이름이 있던 조맹부(趙孟頫) · 장양호(張養浩) · 우집(虞集) 등과 교유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익재난고』 권10의 장단구는 ‘익재사(益齋詞)’라는 명칭으로 청나라 주효장(朱孝臧)이 편찬한 중국역대사 총집인 『강촌총서(彊村叢書)』 끝에 원대사(元代詞)의 하나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이제현은 산문에도 이름이 높아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 8편의 글이 실렸다. 그 가운데에 「송신원외북상서(送辛員外北上序)」 등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익재난고』는 이제현의 『역옹패설』과 함께 우리나라 한문학사상 귀중한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