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이제현(李齊賢)의 손자이며, 이서종(李瑞種)의 아들이다.
1357년(공민 6) 9월 염철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보내려고 하자, 우사간(右司諫)으로 우간의(右諫議) 이색(李穡) 등과 함께 그 폐단을 들어 혁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가 되어서는 새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하여 비용에 충당하고 백성들에게 함부로 걷는 것이 없게 하였다. 또한, 경산부사(京山府使)로 옮겨서는 어려운 송사를 잘 처리하여 평판이 좋았다.
1375년(우왕 1) 판안동부사로 있을 때는 치적이 최상이라 하여 5월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박(林樸)이 북원(北元)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자 임박을 탄핵하여 유배시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아부하는 지조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어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제주에서 바친 고력(羖䍽: 일종의 牝黑羊)을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하였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시켰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지고, 1385년(우왕 11) 7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