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은 조선 후기에 승지와 경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종실 가문으로 인평대군의 손자 의원군 이혁이 생질이다. 숙종 때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였고, 홍문도당록에 오를 정도로 학문이 뛰어나 주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관직으로는 3사의 요직을 거쳐 경주부윤, 강릉부사 등 주로 외직을 역임하였으나 중앙의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저술로는 시와 만사 등이 있다.
26살 때인 1675년(숙종 1)에 식년 생원시 3등에 합격하였고, 1681년(숙종 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예조좌랑을 거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이후로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3사의 요직을 거쳤다. 1689년에는 벽동(碧潼)에 유배된 민정중(閔鼎重)을 처단하자고 주장하였다. 1691년(숙종 17)에는 국구(國舅)가 된 장희빈(張禧嬪)의 아버지 연시(延諡)에 참여하지 않은 자를 파직하도록 한 일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1692년(숙종 18) 승정원의 승지에 임명된 당시 대간들이 현안에 대해 여러 달 침묵하자 이를 비난하는 시구를 지어 기롱(譏弄)하였는데, 이것이 알려져 물의를 빚어내 승지에서 물러나 경주부윤에 임명되었다. 경주부윤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 영장 손여의가 붙잡은 도적 패거리가 손여의의 가족에게 보복하였는데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좌의정 목내선의 비판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이후 원주목사, 나주목사, 종성부사, 강릉부사, 해주목사, 장단부사를 역임하였다. 1703년(숙종 29)에 강릉부사로 재임할 때 목재를 운반하던 역졸이 사망한 사건과 인현왕후 사후 횡령한 혐의로 탄핵되어 의금부에서 붙잡아 수감되기도 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나이와 질병 때문에 창성부사를 끝으로 관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중앙의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주로 외직에 임명되었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홍문도당록에 오를 정도로 학문이 뛰어나 시독관(侍讀官)으로 주강(晝講)에서 『 대학연의(大學衍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빙호유고(氷湖遺稿)』가 있고, 1693년(숙종19)에 당시 경주 부윤 당시 『익재선생문집(益齋先生文集)』을 중간(重刊)하였으며, 그 외에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망고대(望高臺)」 시와, 이원정(李元禎)에 대한 만사(挽詞) 등이 작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