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동계(東溪) 또는 설정(雪汀)이다. 선조 대 ‘ 계미삼찬(癸未三竄)’의 한 사람인 박근원(朴謹元)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증현(朴曾賢), 할아버지는 박순례(朴純禮)이다. 아버지는 참봉 박정서(朴廷瑞)이며,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는 종부시정(宗簿寺正) 유덕창(柳德昌)의 딸이다.
26세 때인 1673년(현종 13) 생원시에 입격하고, 1683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었다. 그 뒤 성균관과 삼사(三司)인 사간원 · 사헌부 · 홍문관의 주요 직책을 거쳐 1693년(숙종 19)에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이후 제용감(濟用監) 정(正), 군자감(軍資監) 정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무안현감, 영광군수, 회양부사를 역임하였다.
박만정은 외척(外戚)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였다. 1693년에 장희빈(張禧嬪)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아경(亞卿)의 지위인 한성부 우윤에 임명된 것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또한 장희빈의 당숙인 역관(譯官) 장찬(張燦)이 거창한 누각을 짓는 등 사치를 부리자 누각을 헐어버릴 것을 논핵(論劾)하기도 하였다. 회양부사로 재임 시에는 백성 원망의 대상이었던 숙원방(淑媛房)이 절수(折受)한 것을 혁파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후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이 장희빈 우대를 제기하자, 시강원 보덕이던 박만정은 왕세자 보호 차원에서 장희빈에게 궁호(宮號)를 별도로 세워줄 것을 주장했다.
1695년에는 ‘을병대기근(乙丙大饑饉)’으로 인해 1696년 3월 7일에서 5월 12일까지 65일간 황해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백성의 참상과 재정 운영을 위한 동전 유통 실태를 점검하였다. 1701년(숙종 27)의 무고옥(巫蠱獄) 이후 장희빈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1716년에 이르러서야 서용되었다.
박만정은 윤휴(尹鑴)의 문인(門人)이다. 1679년(숙종 5)에 윤휴가 금송(禁松)을 베어다 집을 지었다고 한성부 좌윤 남구만(南九萬)이 비판하면서 한바탕 논란이 발생하였다. 박만정은 당시 윤휴를 변호하였는데, 나중에 이 일로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 1685년에는 윤휴를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비긴 박징만(朴徵晩)을 옹호하였고, 1693년에는 윤휴의 아들 윤하제(尹夏濟)의 서용을 건의하였다.
황해도암행어사 활동을 기록한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가 있는데, 1973년 12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집으로 『동계집(東溪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