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일초(一初), 호는 망일재(望日齋). 할아버지는 참판 박광영(朴光榮)으로, 아버지는 박빈(朴蘋)이며, 어머니는 한백(韓伯)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진사시에 합격, 155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봉교가 되었으나 1554년 친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1555년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1558년 사간원정언으로 옮겼고, 곧 시강원사서가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다음 해 홍문관부교리에 승진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0년 홍문관부응교가 되었으나 이듬해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사건(諡號事件)에 연루되어 파출(罷出)되었다. 1562년 다시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으로 옮겼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윤의중(尹毅中)과 함께 재이(災異) 방치책에 대한 소를 올렸다. 이어서 집의·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1564년 호조참의·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566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지를 지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예조참판·대사헌을 번갈아 지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576년 경기감사를 지내고 1583년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동서 분당으로 한창 논쟁이 심할 때 동인의 중진으로 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 등과 함께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 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권신(權臣)인 윤원형(尹元衡)의 악행을 직서했으며, 처결 수완이 뛰어나 대사헌을 여덟 번이나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