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분당이 일어나자 이이는 양시양비(兩是兩非)를 표방하고 그 조정에 힘썼다. 그러나 뇌미(賂米)의 옥사(진도군수 李銖가 같은 서인인 세 사람에게 쌀을 뇌물로 바쳐 일어난 사건.) 등 동인의 행위가 점차 바른 여론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판단, 서인으로 자정(自定)하여 동인과 대립 관계가 되었다.
그 뒤 1583년 여진추장 이탕개(尼湯介)가 육진을 침범했는데,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이는 급한 부름을 받고 내병조(內兵曹)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무렵 그는 병이 심해 가까운 정원(政院)에도 못 나가 임금을 뵙지 못 한 적이 있었다.
또 전마(戰馬)를 납입하면 군사에 뽑힌 자라도 출전을 면제해준다는 방책을 먼저 시행하고 임금의 사후 승인을 받은 일도 있었다. 게다가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경 지대까지 양곡을 운반해 헌납하면 서얼허통을 허용한다는 법을 강행한다든지 하였다.
이에 대사간 송응개, 직제학 허봉 등이 삼사에 연계(聯啓)를 올려, 이이가 병권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파당을 만들어 바른 사람을 배척하므로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간신이라고 하였다.
그 때 영의정 박순(朴淳)과 호군 성혼(成渾)이 언근(言根)을 밝혀 주동자의 처벌을 주장하면서, 송응개와 허봉을 외직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삼사에서는 언론으로 죄를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다시 승지 박근원과 송응개가 이이는 이익을 탐해 지방관을 위협하고 사류를 미워하며 해쳤다고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학생 및 전라도·황해도 유생들이 각각 연명으로 소를 올려, 이이가 모함을 당했다고 변호하는 등 큰 파란이 일어났다.
결국, 선조는 죄를 밝혀 시비를 정하자는 서인 정철(鄭澈)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사감을 가지고 정직을 가장하고 공론을 가탁, 대신을 몰아내고 편당을 지어 임금의 총명을 가렸다는 죄목의 친필교문을 내려, 박근원을 평안도 강계로, 송응개와 허봉을 각각 함경도 회령과 갑산으로 귀양보냈다.
이어서 이이를 이조판서로, 성혼을 이조참판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수찬 김홍민(金弘敏)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는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성혼의 당에 들기를 원한다.”고까지 하였다.
그 뒤 이이는 서인을 대부분 등용했고, 유배된 세 사람의 죄목을 풀어주지 않은 채, 다음 해 1월에 급서하였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