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분소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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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조선 현종 때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함경도 삼수부(三水府)로 유배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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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현종 때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함경도 삼수부(三水府)로 유배된 사건.
내용

윤선도가 서인과 예설(禮說)로 대치된 상황에서 기년설(朞年說)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상소문이 불태워지고 자신은 유형(流刑)에 처해졌다.

1660년(현종 1) 4월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해진 이튿날, 윤선도는 송시열(宋時烈)의 체이부정(體而不正: 嫡子이면서 長子가 아닌 경우)에 입각한 기년복 주장에 대해 “종통(宗統)은 종묘사직을 계승한 임금에게 돌리고, 적통(嫡統)은 이미 죽은 장자에게 돌린 것으로, 이를 대통을 계승한 임금에게 적용한 것은 큰 잘못이며, 이는 임금 세력이 굳건하고 굳건하지 못함과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음을 점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소를 올려 큰 파란을 일으켰다.

서인 김수항(金壽恒)·안준(安浚)·심세정(沈世鼎)·이유태(李惟泰) 등은 이를 고변서(告變書)의 성격으로 규정, 무고한 사림의 화를 초래하려는 뜻이라고 하여 국문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또, 유계(兪棨)는 조정에 회람시킨 뒤 소를 불태우자고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권시(權諰)를 비롯한 남인 세력들은 문제되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종통과 적통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잘못이 없다고 지적하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결국, 윤선도는 팔십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먼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소장은 삼공(三公)에게 회람된 그날로 불태워졌다.

이듬해 4월 가뭄으로 인한 구언교(求言敎)가 내리자, 남인인 조경(趙絅)이 종통과 적통의 구분은 잘못된 것이므로 윤선도의 옥사를 재심하자고 주장하였다. 특히 분소 문제는 공민왕이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광해군이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운 것과 같다고 지적하여 파직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복제 문제가 재론되는 계기가 되어, 영남유생 1,400여 명의 연명으로 된 소가 올려지는 등의 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효종의 위계를 뛰어넘은 왕위계승 문제(소현세자에게는 왕세손이 있었음.)와도 결부되었다.

따라서 왕권의 강력한 개입이 초래된 위에 공론의 대결에 의한 결정이라는 정국운영 양상이 역적시비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상호 공존을 용인하는 붕당정치의 이념을 파탄시키는 계기를 만든 첫번째의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해예송과 윤선도론」(이영춘, 『전국역사학대회발표요지』31회, 1988)
「조선후기 예송연구」(지두환, 『부대사학』11,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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