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호(絅好), 호는 일홍당(日紅堂)·서어(西漁). 예조판서 권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권도(權噵), 아버지는 권전(權槇), 어머니는 이정황(李廷煌)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 장원해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역임했다. 1801년(순조 1)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으로 증광문과의 장원에 이어 전시(殿試)에도 장원해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1803년 부사로서 정사 남공철(南公轍)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1810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면서 당시 점점 확대되어가는 환곡과 군정의 폐단을 논했는데, 제도의 경장보다는 운영의 합리화를 주장했다. 또, 1817년에는 충청도 관찰사로서 조운의 편의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김조순(金祖淳)을 옹호했으며, 1820년에는 병조판서·광주유수를 지내면서 남공철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의 중요한 소임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서학(西學) 문제에서도 '척사(斥邪)'보다도 '부정학(扶正學)'을 내세우는 정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1822년 조인영(趙寅永)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혼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김구주(金龜柱)·심환지(沈煥之)·권유(權裕)를 격렬히 비판했고, 이 문제로 함경도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리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한 어부로서 지내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182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연경에 가는 도중 병으로 죽었다.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을 존경했으며, 심상규(沈象奎)·김상임(金相任)·임이주(任履周)·김이영(金履永)·김희순(金羲淳) 등과 교유해, 김홍도(金弘道)가 그들의 모임을 그린 「은암아집도(隱巖雅集圖)」가 있다.
홍직필(洪直弼)·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국조대학연의(國朝大學衍義)』를 엮었으며, 저서로는 『서어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