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수(聖垂), 호는 국포(菊圃). 할아버지는 권형(權泂)이며, 아버지는 권탐(權撢)이다.
1765년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좋은 가문 출신은 아니나 문장력이 있고 기개가 강하여 주로 사헌부 · 사간원의 직책들을 거치면서 신임의리(辛壬義理: 경종 대신 왕세제(후일의 영조)를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은 노론측 입장을 일컬음.)의 반대자들을 극렬하게 공격하였다.
1790년(정조 14)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다가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창원에 유배되었다.1795년에는 서학을 준열히 공격하여 이가환(李家煥)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정치적으로 유언호(兪彦鎬) · 심환지(沈煥之)의 당에 속하여 정조 말년에는 이조참판 · 공조판서 · 좌참찬을 거친 다음 순조 즉위 후 지실록사(知實錄事)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 1)에 천주교도 박해가 시작되면서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이른바 벽파(僻派: 사도세자를 배척한 노론 당파)의 언론을 선도하여 윤행임(尹行恁) · 정민시(鄭民始) · 이재학(李在學) · 서유린(徐有隣) 등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또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와 순조와의 국혼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삼간택(三揀擇)을 방해하였다 하여 순원왕후의 가례가 끝난 뒤, 1804년 6월 가족, 제자들과 함께 추국(推鞫)을 당하였다.
마침내 김관주(金觀柱) · 정일환(鄭日煥)의 사주를 받은 대역부도죄로 지목, 2차의 혹심한 형을 받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