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의 측근의 당하 관원을 지방군현에 비밀리에 파견해 위장된 복장으로 암행하게 한 왕의 특명사신이다. 지방 수령의 잘잘못과 백성의 고통, 어려움을 탐문하여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는 것을 직무로 했다. 일반어사와 달리 왕이 친히 임명하고 그 임명과 행동을 비밀에 부치는 특징을 가졌다. 암행어사 파견에 대해서는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역대 왕들은 이를 꾸준히 시행하였고, 지방제도 정비와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더욱 보완·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왕조정치가 점점 쇠미해지면서 더 빈번히 파견되었다.
당하 관원 중에서 임시적으로 특명해 이들을 비밀리에 보내면서 수령의 득실(得失 :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과 백성의 질고(疾苦 : 고통이나 어려움)를 탐문해 돌아와서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는 것을 직무로 하였다. 수의(繡衣) 또는 직지(直指)라고도 한다.
암행어사가 일반어사와 다른 점은 일반어사는 이조(吏曹)에서 임명하고 그 거동이 공개적인 것에 비해, 왕이 친히 임명할 뿐 아니라 그 임명과 행동을 비밀에 부친 점에서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비밀을 본질로 하는 특명사신 파견의 전례는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헌부의 당하 관원을 행대(行臺) 또는 행대감찰이라 해 지방에 파견할 때, 혹은 왕의 측근의 관원을 경차관(敬差官)에 임명하고 지방에 파견할 때, 염문규찰(廉問糾察)의 편의상 비밀리에 파견해, 잠행체찰(潛行體察)했다든가 암행규찰(暗行糾察)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암행을 전제로 한 불시분견(不時分遣) · 출기불의(出其不意) · 성기도종(省其徒從) · 제기선성(除其先聲: 행방을 알리지 않는 것) · 추생분견(抽栍分遣 : 추첨분견, 즉 암행어사가 행선하는 군현을 왕이 추첨으로 결정함.) 등의 기사도 실려 있다. 당시 그들의 성과가 암행어사 탄생의 계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1392년(태조 1) 의주 등 국경지역의 불법적인 월강무역(越江貿易)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시대 최초로 행대어사를 분견한 예가 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수령 · 감사 등 지방관과 경차관(敬差官) 및 토호(土豪) · 향리 등 지방세력의 불법탐학을 규찰하는 것이었다. 즉, 태조∼ 태종 때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로, 이들은 수령보다 토호 등 지방세력의 불법을 집중적으로 규찰하였다. 반면, 세종∼ 단종 때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의 시행과 더불어 수령의 권한이 확대되고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수령의 무능과 비리를 적발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이후 성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파견되면서 지방제도 정비와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이 제도를 더욱 보완 ·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세조∼성종 때에는 행대어사의 품계가 수령과 같은 6품이어서 불법수령을 직단(直斷)할 수 없는 한계를 시정하였다. 즉, 5품 이상의 관료에게 대관직(臺官職)을 겸임시켜 3품 이하의 관원에 대한 직단권을 발휘할 수 있는 분대어사제도(分臺御史制度)를 시행해 수령규찰의 임무를 전담시켰다. 이후 지방관들이 자신의 직분이 안정되면서 이를 이용해 백성에 대한 탐학과 질고를 은밀히 자행하는 예가 많았다. 이에 행대어사제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행대어사를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령감찰의 방법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성종 때 조지서(趙之瑞)는 이른바 측근의 관원으로 응교직(應敎職)에 있었는데, 그 직을 가진 채 조선 팔도에 각각 추생분견한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활동과 관련해 1490년(성종 21) 1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지서가 어사가 되어 항상 번개와 같이 관부에 출입함이 야골(野鶻 : 들에 사는 매)과 같으며, 순찰할 때는 복색이 무상해 혹은 관복하고 혹은 미복(微服 : 변장하는 것)해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 여기서의 '어사'는 암행어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특명사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공식적으로 어사명칭을 붙이지 않은 것은 어사가 황제의 특명사신이므로 그 사용을 삼간 때문으로 보인다. 중종대에 한산군(漢山君) 이손(李蓀)은 암행지법(暗行之法)은 성종 때의 조익정(趙益貞)이 계문해 생긴 것이라고 했는 바, 위 기록과 부합하는 주장이다.
암행어사라는 성어(成語)가 실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4년(1509) 11월 정묘조에 부원군(府院君) 김수동(金壽童)이 "근일 암행어사를 분견해 수령의 범죄를 적발하는 것은 편치 못한 일이오."라고 한 발언 속에 나타난다. 이 말은 중종이 당시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많이 파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종은 1507년 정월 기묘일에 어사 권홍(權弘) 등 인명을 분견하였다. 그런데 출입촌항문민폐막(出入村巷問民弊瘼 : 촌항에 출입해 백성의 질고를 물음.), 제각읍지공자재건후(除各邑支供自齎乾餱 : 각 고을에서의 대접을 거절하고 말린 밥을 휴대함.), 무제번폐(務除煩弊 : 힘써 번거로움과 폐 끼치는 것을 덞.)했다는 것을 보면, 분견된 6인의 어사는 암행어사였음이 틀림없다. 암행어사 파견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있었으나, 역대의 왕들은 이를 꾸준히 시행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왕조정치가 점점 쇠미해지자 더욱 빈번히 파견되었으며, 제도적으로도 정비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암행어사가 아닌 각종 일반어사도 많이 파견되어, 조선 말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각종 어사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는 어사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암행어사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단계의 형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왕이 어사가합인(御史可合人 : 어사후보자)의 추천을 명령하면 삼의정(三議政)이 시종관안(侍從官案)을 놓고 가합인을 뽑아 초계(抄啓 : 선발해 아룀.)한다. 왕은 전국 360군현의 이름을 기입한 참댓가지가 들어 있는 죽통(竹筒 : 추첨통)에서 암행시찰할 군현을 뽑아 추첨으로 결정했는데, 이를 추생(抽栍)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암행어사를 일명 추생어사(抽栍御史)라고도 불렀다. 왕의 소환으로 어전에 나온 어사가합인은 왕으로부터 추생한 군현의 이름이 기입된 봉서(封書)를 지급받고, 승정원에서 승지로부터 팔도어사재거사목(八道御史賫去事目) 한 권, 마패(馬牌) 한 개, 유척(鍮尺) 두 개를 지급받고 퇴궐한다.
봉서는 암행어사 임명장이나 다름없는데, 표면에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 남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 또는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 동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이라고 써 있었다. 어사는 이를 지정된 대문 밖에 나가 비로소 열어보고 임무를 확인한 뒤 목적지로 직행하였다. 마패는 역마 사용권을 부여하는 증패로 1마패에서부터 5마패까지 5종이 있었는데, 암행어사에게는 2마패가 지급되었다. 마패의 소지는 봉명사신(奉命使臣)임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권력의 상징이었고, 어사의 봉고(封庫)나 처분문서(處分文書)에 마패를 날인해 직인으로 대용하였다. 유척은 영조척(營造尺)으로서, 형구(刑具)의 남조(濫造 : 권력을 남용해 만듦.) 여부를 검열하는 데 사용하였다.
암행어사는 명령을 받은 바로 그날 즉일 출발이 원칙이었다. 역마를 타고 한두 명의 대리(帶吏 : 곁에서 시중을 두는 하급 관리)를 데리고 목적지로 향하였다. 관내에 들어가면 수령의 탐도혹형(貪饕酷刑)이나 향간호우(鄕奸豪右)의 가렴주구를 탐지하기 위해 폐의파립(弊衣破笠 : 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으로 변장하고, 풍찬노숙 염문정찰(廉問偵察)하였다. 암행어사가 염찰을 마치고 생읍(栍邑 : 추생군현의 고을)에 들어가 수령의 관가에서 개좌(開坐 : 관가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음.)하는 것을 출두라고 불렀다. 출두의 방법은 관가의 삼문(三門)을 역졸과 대리가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출두!'를 외친다.
암행어사는 잠적장소에서 유유히 관가로 행차해 수령과 이속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동헌(東軒) 대청에 착석 개좌한다. 공문서의 검열을 번열(反閱)이라 하고, 관가창고의 검열을 번고(反庫)라 한다. 불법문서가 현착(現捉)되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兵符)를 압수하고 창고에 ‘봉고(封庫)’ 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해 창고 문을 봉한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하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재심해 풀어주고 체수(滯囚 : 죄가 결정되지 않아 오랫동안 감금된 죄수)를 풀어준다. 그리고 양민을 괴롭히는 향간호우를 적발 착수비관(捉囚秘關 : 어사발급의 영장)을 발급, 체포구금하고 처벌하였다. 또한, 원부(怨夫) · 원부(怨婦)의 소지(所志 : 訴狀)나 정장(呈狀)을 접수하고, 제사(題辭 : 판결 · 처분) · 입안(立案 : 증명문) · 완문(完文 : 처분하는 문서) 등을 발행해 원한을 풀어주었다.
암행어사가 소임을 마치고 귀환하면 서계(書啓 : 보고서)와 별단(別單 : 부속문서)을 각 한 통씩 작성해 왕에게 복명하는 날에 제출한다. 서계는 수계(繡啓)라고도 불렀으며 생읍시찰에 관한 특별지시사항, 봉서에 지시된 특별사항 등을 채록 · 탐문해 서한형식으로 조목조목 기술하였다. 별단은 서계에 미진한 사항, 연도제읍(沿道諸邑)에 관한 시찰사항, 어사재거사목에 규정된 일반적인 폐정사항에 대한 개선책을 담은 의견서로서, 어사 자신의 교양과 정치적 식견을 개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계는 필수적 복명요건이지만 별단은 임의사항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대에는 서계와 별단의 내용 여하로 어사의 인물이 평가되었으며, 출세에 영향이 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암행어사가 귀환하고도 장기간 서계를 제출하지 않거나 서계를 대필시킨 것이 알려지면 추고(推考) · 처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