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율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의 성문형법.
정의
고려시대의 성문형법.
개설

『당률(唐律)』과 『송형통(宋刑統)』을 참작해 고려의 실정에 맞도록 제정한 고려의 독자적인 성문형법을 말한다.

고려율의 존재여부

고려 건국 초에는 신라의 율령제도를 비롯해 신라 하대에 성장한 지방향호(地方鄕豪)와 골품제를 포함한 관료계급의 지배세력을 평화적으로 계승해 건국유공자집단과 함께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또한 토지에 예속된 양민과 백정(白丁)계층, 향(鄕)·소(所)·부곡(部曲)·진(津)·역(驛)·관(館)·처(處) 등의 지역적 천민집단 및 최하층·최하천으로서의 노비를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엄격한 신분사회를 유지하는 정책을 세웠다.

이와 같이, 초기에는 통일신라의 율령제도를 답습했으나 왕권이 정착, 확립됨에 따라 고려사회에 맞은 독자적인 율령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사』 형법지(刑法志) 서(序)를 통해 고려에서는 당나라제도를 참작해 71조의 율을 제정했고, 이 중에는 옥관령(獄官令)이 포함되고 있어 고려율과 고려령을 함께 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71조에서 옥관령 2조를 빼면 고려율은 『당률』 502조를 69조로 압축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고려사』에 고려율을 제정한 관계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고려 독자의 율령 제정은 없었으며, 결옥(決獄)에 적용한 기준법규는 『당률』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율 조문의 적용례가 성종 6년(987) 정월에 보이며, 1047년(문종 원년) 6월에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율령에 잘못된 부분이 많아 진실로 걱정되니, 시중 최충(崔冲)은 여러 율관(律官)을 모아 거듭 상세히 교정해 타당함을 따르는 데 힘쓰라.”고 한 율령의 개정을 뜻하는 기사가 있다.

또한 1056(문종 10) 8월 각종 서적의 인본(印本)을 서경(西京)의 학원(學院)에 보낼 때, 그 속에 율서(律書)도 끼어 있어 고려율령의 인본 간행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따라서, 고려율은 성종 때에 편찬·간행되었고, 문종 원년 6월 시대에 맞게 개정하면서 율문 수를 71조로 압축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고려율이 독자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다른 근거는 고려율을 입법할 때 『당률』·『당률소의(唐律疏議)』의 조문을 그대로 채용한 것도 있으나, 축소·변경·첨가해 변용한 것이 많고, 『송형통』과 송법에서도 채용한 흔적이 있으며, 금나라의 법제 용어도 사용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얼굴에 자자(刺字)하는 형벌인 삽면형(鈒面刑) 등 고려율 독자적인 형명(刑名)의 존재와 ‘당사의율문(當死依律文)’·‘의율단죄(依律斷罪)’와 같은 고려율 적용의 실정적(實定的)인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아, 고려율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형법지 서에서는 고려율의 항목을 『당률』의 항목에 따라 명례(名例)·위금(衛禁)·직제(職制)·호혼(戶婚)·구고(廐庫)·천흥(擅興)·도적(盜賊)·투송(鬪訟)·사위(詐僞)·잡률(雜律)·포망(捕亡)·단옥(斷獄)의 12율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나 형법지 편찬자는 그 편성을 위의 당률 항목에 따르지 않고 『원사(元史)』의 형법지 체계를 따르고 있다.

잡다한 형법지 편찬 자료에 율조문(律條文) 뿐만 아니라 영조문(令條文)도 있고 관계기록도 섞여 있었으므로, 이를 정리함에 있어 항목을 명례·공식(公式)·피마식(避馬式)·공첩상통식(公牒相通式)·직제·간범(姦犯)·호혼·대악(大惡)·살상·금령·도적·군율(軍律)·휼형(恤刑)·소송·노비 등 15개 항목으로 분류하고, 율령관계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율의 항목과 일치하거나 항목의 이름을 변경한 것도 있다. 또한 공식·피마식·공첩상통식·금령·휼령·소송·노비 등의 각 항목은 고려령에 속하는 기록도 보인다.

동시에 형법지의 항목이 율령적으로 잘 정리·분류된 것이 아니고 서로 뒤섞이고 있어, 율조문을 가려내어 고려율을 복원하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학자에 따라 조문 색출과 편성이 다르다.

율항목을 명례·직제·호혼·도적·대악·금령·간비(奸非)·옥관 등 8항목으로 분류, 정리하고 76조를 채취하고, 다시 이것을 『당률』의 체계에 따라 총 64조를 채취한 경우가 있다.

또한, 조문을 조사해 108조를 수집하고 『당률』의 항목과 비교해 분류하는 작업 등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고려율의 실체를 밝힌 경우는 보이지 않고 있다.

변천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침략 등 외환과 내우가 심해 정치가 문란해짐에 따라 율령제도도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범례에, 형법지를 비롯해 각종 사서(史書)를 편찬할 당시 고려의 제도·조격(條格)에 관한 사료가 많이 궐략(闕略)되었고,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 제가(諸家)의 잡록 등을 참고했다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율령에 관한 법전은 이미 망실된 지 오래였던 것 같다.

『고려사』 형법지의 율령 조문은 각종 기록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편찬 당시 자료의 빈곤 또한 배제할 수가 없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율령(高麗律令)」(임규손, 『동국대학교논문집(東國大學校論文集)』 13, 1974)
『高麗律』(花村美樹, 朝鮮社會法制史硏究所收, 東京 岩波書店, 1937)
『朝鮮法制史稿』(淺見倫太郞, 東京 岩松堂書店, 1922)
집필자
전봉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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